화개장터는

 

지리산 맑은 물이 흘러내려와서 섬진강과 만나는 곳에 자리한 화개마을. 경상남도와 전라남도를 이어주는 화개장터는 해방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5대 시장중의 하나로 전국의 어느 시장보다 많은 사람이 붐볐던 곳이다.
이곳엔 보통 5일장이 섰으며, 지리산 화전민들은 고사리, 더덕, 감자등을 가지고 와서 팔고, 전라도 구례, 경남 함양 등 내륙지방 사람들은 쌀보리를 가져와 팔았다. 그리고 전국을 떠돌던 보부상들도 이 장을 놓칠세라 생활용 품을 가지고 왔으며, 또한 여수, 광양, 남해, 삼천포, 충무, 거제등지의 사람들 은 뱃길을 이용하여 미역, 청각, 고등어 등 수산물을 가득 싣고와 이 화개장터에서 팔았다.
김동리 소설 「역마」의 무대이기도 한 화개장터는 벚꽃길 따라 수많은 관광객이 지리산 쌍계사와 더불어 왕래하고 있으며, 화개장터에서 쌍계사까지 이어지는 도로변은 봄날이면 환상적인 벚꽃터널을 이룬다. 옛날 시골장터의 정취를 물씬 느낄 수 있는 화개장터에는 국밥집, 도토리묵, 재첩국집, 주막, 엿장수, 산나물, 녹차등의 특산품등이 있어 훈훈한 인심을 주고 받는 만남과 화합의 명소로 자리매김하고 있으며, 과거부터 무엇이든지 자유롭게 사고 팔수 있던 곳, 왁자지껄 흥정속에서 사라져 가는 전통 5일장 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선진강의 벗꽃길을 달리다 보면 남도대교가 보이는데 그 옆에 화개장터가 있다.

 

 

화개장터에서 일어난 3.1운동기념비.

 

 

화개장터는 시골스러운 맛은 없고

 

 

깨끗하게 정돈된 그런 시장이다.

   

 

국밥과 은어회,재첩국 그리고 녹차를 판매한다.

 

 

장터 풍경...

 

 

화개장터가 유명하기에

 

 

커다란 시골장이 서는줄 알았는데 장날이 아니라 그런지 조금은 한산하다.

 

 

각종 농산물을 파는 거리도 한산하다.

 

 

하동안내도.

 

악양에 있는 토지의 무대인 최참판댁으로 출발. 

아침 일찍부터 빡빡하게 준비한 일정으로 인하여 쉬지도 않고 계속 강행군을 했더니 날씨는 덥고 습도

 

또한 높으니 조금만 움직여도 땀이 솟는다. 점심을 먹으러 화엄사 입구에 있는 음식점으로 들어서니 에

 

어컨의 바람이 너무나 시원해서 흐르던 땀이 멎는다.

 

 

산나물한식당.

 

 

산채비빔밥+콩나물국밥+동동주+감자전을 주문했다.

 

 

한 잔을 주문한 동동주에는 얼음이 동동 떠 있다.

 

 

각종 나물들이 한 상 차려지고

 

 

가지

 

 

버섯

 

 

깻잎

 

 

고들뻬기 

 

 

고구마줄기

 

 

마늘쫑

 

 

묵은지

 

 

버섯

 

 

무슨 나물?

 

 

고추

 

 

드디어 산채비빔밥이 등장하고

 

 

된장국물

 

 

밥이 공기에 꽉 ...

 

 

얼큰해 보이는 콩나물국밥.

 

 

산채비빔밥을 쓱삭 비벼서 먹고

 

 

김치전.

 

 

감자전을 젓가락으로 슥슥 찢어서

 

 

감자전을 한 젓가락 들어서

 

 

간장 양념장에 찍어서 먹어준다. 

 

배도 부르고 운전 때문에 동동주를 한 모금 마셨더니 갈증만 난다.

 

자 이제는 전라도와 경상도를 가로 지르는 섬진강 줄기따라 화개장터가 있는 하동으로 갑시다.

 

화엄사는 천은사에서 그리 멀지않은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에 있는 화엄사는 544년(백제 성왕 22년)에 연기 조사가 창건하였다하며 절의 이름은 화엄경(華嚴經)의 화엄 두글자를 따서 붙였다고 한다. 처음에는 해회당(海會堂)과 대웅상적광전(大雄常寂光殿)만 세워졌고 그후 643년(선덕여왕 12년) 자장율사에 의해 증축되었고 875년(신라 헌강왕 1년)에 도선국사가 또다시 증축하였으나 임진왜란때 불타 없어진 것을 1630년(인조 8년)에 벽암선사가 절을 다시 세우기 시작하여 7년만인 인조 14년(1636) 완성 하였다.
사찰내에는 각황전을 비롯하여
국보 4점, 보물 5점, 천연기념물 1점, 지방문화재 2점등 많은 문화재와 20여동의 부속건물이 배치되어 있다. 특히 건물의 배치에 있어서는 일주문을 지나 약 30°로 꺽어서 북동쪽으로 들어가면 금강역사(金剛力士), 문수(文殊), 보현(普賢)의 상을 안치한 천왕문에 다다르는데 이문은 금강문과는 서쪽방향으로 벗겨놓는데 독특한 특징이다.

 

 

화엄사 입구

 

 

천은사로 흐르는 계곡보다 물이 많고 더욱 수려하다.

 

 

신라 문무왕때 의상대사가 건립.

 

 

사찰의 규모가 천은사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크다. 건물이 33개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웅전으로 가는 길인데 공사중이라서 다소 소란스럽고 천은사에 비하면 건물이 많아서인지 다소 답답

 

하게 느껴지지만 웅장하고 고풍스러운 맛이 있다.

 

 

 

 
화엄사 대웅전
 
화엄사에 있는 조선 중기의 목조건물. 보물 제299호. 〈사적기〉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36년 벽암대사가 중건했다고 한다. 앞면 5칸, 옆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높은 석단 위에 남향으로 세워졌다. 기둥은 배흘림으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배치했으며 기둥 위와 사이에는 공포가 짜여져 있는 다포계 형식이다. 공포는 내외3출목으로 외부에는 쇠서[牛舌] 끝이 잘려 단순한 형태로 되어 있고, 내부의 살미첨차[山彌遮]는 초화형(草花形)으로 장식되는 등 조선 중기 목조건축의 특징을 보여준다. 앞면에는 정자무늬와 빗살무늬로 된 삼분합(三分閤)이 달려 있으며 그 위에는 교창(交窓)을 두어 건물이 높은 편이다. 내부에는 우물마루를 깔았으며 천장은 우물천장으로 외둘레간보다 한층 높게 만들었다. 불단 뒷면과 좌우에는 각각 2, 3개의 고주를 세워 대들보를 받치게 했으며, 불단 위에는 비로자나삼존불상이 안치되어 있고 1757년(영조 33)에 제작된 후불탱화가 있다. 이 불상 위로는 각각 J자 형의 처마로 된 정교하고 장식적인 닫집이 있다.

 

 

화엄사 동 오층석탑.

 

이름 : 화엄사 동 오층 석탑(華嚴寺 東 五層 石塔)
문화재 : 보물 132호
소재지 : 전라남도 구례군 화엄사
제작시기 : 통일 시날 시�(9세기)

화엄사 대웅전 앞에는 동서로 쌍탑이 서 있다.
그 중에 동쪽에 서있는 것이 이 탑으로 크기는 서로 비슷하지만
서탑이 조각과 장식이 화려한 반면, 동탑은 아무런 장식없이 단정하다.
탑은 1층 기단위로 5층의 탑신을 올린 형태로,
서탑의 기단이 2층인 것과 조금 다른 모습이다.
기단의 각 면에는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을 본뜬 조각을 두었다.
탑신는 1층 몸돌이 높이에 비해 넓어 안정감이 있다.
또한 각 층 몸돌의 너비가 줄어드는 정도는 큰 것에 비해
높이의 줄어드는 정도가 적어 늘씬해 보인다.
지붕돌은 매우 평평하고 얇은데 몸돌을 따라 너비의 줄어드는 정도가 큰 편이며,
그 중 1층과 2층의 차이가 한층 크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과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이 있고,
다시 사잇기둥을 두어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가 올려져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탑이 2층 기단인데 비해 1층 기단으로 되어 있고,
기단부의 돌구성이 다소 느슨해진 경향이 있는 점으로 미루어
만들어진 시기는 서탑과 비슷한 9세기경으로 짐작된다.

 

 

대웅전 앞에는 같은 규모의 오층석탑이 있다.(화엄사 동 오층석탑과 서 오층석탑)

 

서 오층석탑.

화엄사 대웅전 앞에 동·서로 있는 쌍탑 가운데 서편에 자리하고 있는 탑으로, 동탑이 아무런 조각이 없는 반면 서탑에는 조각과 장식이 가득하다.
형태는 기단(基壇)은 2층이고, 그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세워져 있다.
아래층 기단 각 면에는 안상(眼象) 속에 12지신상(十二支神像)을 방향에 따라 배치하였고, 윗층 기단은 각 면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모양을 본떠 새겼으며, 나뉜 두 면에는 8부신중(八部神衆)을 조각하였다.
탑신의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돌이며 몸돌에는 각 층 모서리에도 기둥모양을 본떠 새겨 두었다.1층 몸돌 4면에는 4천왕상(四天王像)을 조각 배치하였다.
지붕돌은 각 층마다 밑면에 5단의 받침을 갖추고 처마밑은 수평이 되게 하였다.
머리장식에는 2층의 단을 둔 받침 위로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가 놓여 있다.
석탑의 형태는 높고 가파르면서도 상하의 체감비율이라든지, 지붕돌을 경쾌하게 처리한 수법 등이 잘 조화되어 우아한 기품을 지니고 있다.
특히 아래층 기단의 12지신상 조각은 석탑에서 흔하지 않은 예의 하나이다.
위·아래층 기단과 1층 몸돌 세 곳에 나타난 조각상은 그 배치에 보다 신중을 기하였고 특히 12지신·8부중·4천왕 모두 불교의 수호신적 기능을 지닌 조형물이라는 점에서 탑 안에 모셔진 사리를 보호하려는 의도가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조각상을 각 부분에 새긴 점이나, 지붕의 조형이 보다 유연한 느낌을 주는 점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석탑 남쪽으로는 안상과 연꽃이 조각된 배례석이 놓여 있다

 

 

화엄사 내부 풍경.

 

 

웅장함을 자랑하는 각황전

 

화엄사에 있는 조선 후기의 목조건물. 국보 제67호. 원래 의상법사가 670년에 건립한 3층 장륙전으로 장륙존상(丈六尊像)을 봉안했으며 사방 벽은 화엄석경으로 장엄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99~1702년에 성능대사가 중건했으며, 1930년대에 일본인에 의해 중수되었는데 이때 건물의 일부가 약간 변형된 것으로 보인다. 앞면 7칸, 옆면 5칸의 중층 팔작지붕 건물로 높은 석조 기단 위에 서향으로 세워졌다. 기둥은 평주이며 기둥머리 위에 창방(昌枋)과 평방(平枋)이 놓여 있다. 평방 위와 기둥 사이에 공포를 짜올린 다포계(多包系)이며 상하층 모두 내외2출목(內外二出目)으로 되어 있다. 첨차는 아랫면이 둥글게 처리되었고 쇠서의 끝이 모두 위로 올라가 활처럼 생겼는데 이러한 특징은 조선 초기 목조건축에서 많이 볼 수 있다. 1층 앞면에는 빗살무늬와 솟을살무늬로 장식된 살문을 달고 옆면과 뒷면은 일부만 벽으로 막았다. 2층은 사방에 모두 작은 창을 달았다. 내부는 통층(通層)으로 공간이 넓으며 고주(高柱)를 사방에 배치하고 그 위에 대들보로 종량(宗樑)의 한쪽 끝을 받치고 있다. 천장은 우물천장이며 그 주위에 경사진 빗반자가 있는 점이 특이하다. 중앙의 뒤쪽으로는 대불단 위에 석가불·아미타불·다보불(多寶佛)이 있고 그 좌우에 보현보살·문수보살·관음보살·지적보살(知積菩薩)이 있다. 이 불상·보살상들은 3m가 넘는 거대한 불상으로 도금불사 때 발견된 복장기(腹藏記)에 의해 1703년(숙종 29)에 조성되었음이 확인되었다. 또한 불단 밑에는 임진왜란 때 파손된 1,500여 점의 석경이 봉안되어 있다.

 

 

각황전 내부의 기둥이 오래된 연륜을 보여준다.

 

 

각황전 내부의 불상들.

 

 

대웅전과 화엄사각황전 앞 석등을 을 배경으로 찰~칵.

 

화엄사 각황전 앞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석등. 국보 제12호. 높이 636cm. 기단부·화사석(火舍石)·상륜부를 모두 갖춘 완전한 형태의 팔각석등으로 현존하는 우리나라 석등 가운데 가장 크다. 하대석의 각 면에는 안상(眼象)을 새기고 그 위에는 귀꽃이 장식된 8엽의 복련(覆蓮)을 돌렸으며 연화대 위에는 다시 구름무늬와 8각 굄이 있다. 간주석(竿柱石)은 고복형(鼓腹形)으로 전형적인 팔각석등과는 약간 다르며, 배가 볼록하게 나온 중앙에는 2줄의 띠를 돌렸는데 그 위에 8개의 꽃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이러한 형태는 통일신라시대의 실상사석등·선림원지석등·임실용암리석등·개선사지석등(891) 등 전라도지방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상대석의 밑에는 8엽의 앙련이 조각되어 있고 위에는 8각의 소로형 굄이 있다. 화사석은 4면에 화창(火窓)을 내었으나 다른 면에는 아무런 장식문양도 없다. 옥개석은 얇은 편으로 각 모서리에는 직립한 귀꽃 장식이 크게 표현되었으며 추녀는 수평으로 되어 있다. 상륜부는 높은 노반(露盤), 앙화(仰花), 보륜(寶輪), 귀꽃이 장식된 보개(寶蓋)를 차례로 얹고 정상에는 다른 석탑과 마찬가지로 높은 간주가 달린 보주(寶珠)로 장식했다. 이 석등은 기단보다 상륜부가 크고 폭이 넓어 비례가 맞지 않고 조각수법도 둔중한 느낌을 주지만, 전체적으로 거대한 크기에서 오는 장중함으로 볼 때 통일신라 말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

 

화엄사 각황전 서남쪽의 효대(孝臺)라고 부르는 높은 언덕 위에 있는 신라시대 3층석탑. 국보 제35호. 높이 550cm. 〈사적기〉에 의하면 자장율사가 연기조사의 효성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일종의 불사리 공양탑이라고 한다. 그러나 석탑의 양식으로 보아 조성연대가 7세기 중엽까지 올라간다고 볼 수 없다. 이 석탑은 2층 기단에 3층의 탑신이 놓여 있으나 상층기단이 특이하게 사자상으로 되어 있어 이형석탑(異形石塔)에 속한다. 지대석 위에는 3단의 높은 굄이 하층기단을 받치고 있으며 하대석의 각 면에는 우주를 조각하고 그 사이에 안상을 3구씩 배치했다. 안상 안에는 천인상(天人像)을 조각했는데, 천의자락을 날리면서 연화대좌에 앉아 악기를 연주하거나 춤을 추거나 공양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지물(持物)도 각기 다르다. 상층기단에는 암수 2쌍의 사자를 네 모퉁이에 각각 배치하고 머리 위에 연화대를 얹어 탑신을 받치고 있으며 그 가운데에 합장하고 서 있는 승상(僧像)은 머리로 탑신을 받치지는 않았으나 그 위에 연화무늬를 조각하여 천개를 표현했다. 석사자상은 연화대좌 위에 정면을 보고 앉아 있는데, 입을 벌린 채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고 있어 사실적으로 표현되었으며 각각 표정이 달라서 인생의 희로애락을 나타낸 것이라고 한다. 또한 승상은 연기조사의 어머니인 비구니라고 하며 이 석탑 바로 앞에 있는 석등 아래쪽에 꿇어앉아 있는 승상은 효성이 지극한 연기조사가 불탑을 받들고 서 있는 어머니께 석등을 머리에 얹고 차공양을 올리는 모습이라고 한다. 상층기단 갑석은 윗면에 약간 경사가 있으며 중앙에는 2단 굄이 있다. 탑신부의 옥신과 옥개는 각각 다른 돌로 이루어졌는데 1층 옥신 4면에는 자물쇠가 장식된 문비(門扉)를 새기고 그 좌우에는 인왕상·사천왕상·보살상이 조각되어 있다. 2, 3층의 옥신에는 우주만 모각되어 있다. 옥개석은 5단의 층급받침으로 낙수면이 평박하고 처마 끝부분에서 예리하게 반전되어 있어 경쾌한 느낌을 준다. 옥개석의 각 층 윗면에는 2단의 굄을 두어 옥신석을 받치도록 했다. 상륜부에는 노반·복발만 남아 있다. 이 석탑은 알맞은 체감비율과 옥개석의 경쾌한 반전, 우주 대신 4마리의 사자를 사방에 배치한 점, 하층기단 및 1층 옥신의 뛰어난 조각수법 등에 의해 통일신라시대 전성기인 8세기 중엽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석탑형식은 고려시대의 사자빈신사지석탑(1022)을 비롯하여 홍천물걸리4사자석탑 등으로 이어졌으며 조선시대에도 제작되었다. 

 

 

화엄사 사사자3층석탑

 

 

석탑 앞에는 불두화도 피어있다.

 

 

화엄사 앞으로 흐르는 계곡에서 탁족을 하면서 발의 피로를 풀고

 

 

계곡물에 탁족을 하고...

 

점심을 먹으러 가야 할 시간이다. 

 

천은사는 지리산 3대 사찰 중 하나로서 통일신라 흥덕왕 3년(828) 덕운선사가 세워 처음에는 절 이름을 감로사라 하였다. 그 뒤 통일신라 헌강왕 원년(875) 보조선사가 고쳐 지었고 정유재란 때 소실되어 다시 고쳐 세우고 수리하였으나 영조 49년(1773)에 화재로 절의 모든 건물이 불타 버렸다. 그 이듬해부터 혜암스님이 복원하면서 오늘의 천은사로 이름을 고쳐 불렀다고 한다.

현존하는 건물은 극락보전, 팔상전, 응진전 등 20여 동의 건물이 있다. 현 법당인 천은사 극락보전(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50호)은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또한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내부에 있는 아미타후불탱화(보물 제924호)는 18세기 우리나라 불화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천은사로 들어가는 입구인 일주문.

 

일주문(一柱門)은 사찰로 들어가는 첫 번째 관문이다. 원래 지붕을 가진 일반적인 건축물이라고 하면 사방에 네 개의 기둥을 두어 지붕의 하중을 지탱해야 하는 것이 상식이다. 하지만 일주문은 한 줄로 나란한 두개의 기둥만으로 지붕을 지탱하며 서 있는 건축물이다. 일주문이란 명칭은 바로 이런 건축적인 특징에서 붙여지게 된 것이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모습에 비추어 일심(一心)이라는 의미를 부여한다. 즉 신성한 사찰에 들어서기 전에 흐트러진 마음을 하나로 모아 진리의 세계로 향하라는 상징적인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다. 일주문의 경지는 아직 무언가를 깨달았다고는 할 수 없는 위치이다. 다만 단호한 결심과 실천 의지를 보이면서 구도자로서의 길을 시작하는 단계일 뿐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일주문을 기준으로 중생이 사는 세상인 세간(世間), 그리고 속계(俗界)와 생사 번뇌에서 해탈한 깨달음의 세계인 출세간(出世間), 즉 진계(眞界)로 나누어진다는 것이다.

 

 

일주문을 지나면

 

 

소나무가 울창하다.

 

 

천은사로 들어가는 다리와 정자 수홍루.

 

일주문을 지나 사시사철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 위로 무지개 다리가 놓여 있는데 이 계곡 위에 놓인 다리를 보통 피안교라 부르고 있다. 피안이란 온갖 번뇌에 휩싸여 생사윤회하는 고해의 이쪽 언덕 건너편에 있는 저 언덕을 뜻하는 말이다.

그곳은 아무런 고통과 근심이 없는 불·보살의 세계이다. 따라서 피안교란 열반의 저 언덕에 도달하기 위해 건너는 다리를 뜻하고 있다. 우리들이 사찰에 갈 때 피안교를 건너는 것은 세속의 마음을 청정하게 씻어버리고 이제금 진리와 지혜의 광명이 충만한 불·보살님들의 세계로 나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만큼 불자들은 스스로의 마음가짐을 돌이켜 보는 경건한 자세가 필요하겠다 .

천은사에는 그 다리 위에 2층 누각인 수홍루가 있다. 수홍루는 정면 1칸, 측면 한칸인 2층 누각으로 조선후기에 만들어졌다. 계곡과 어우러진 누각은 천은사를 대표하는 경치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아릅답다.

정면 현판의 글씨는 염제(念齊) 선생의 글씨이다.

 

 

천은사에서 흐르는 계곡물이 지리산담수호로 흐른다.

 

 

지리산에서 흐르는 계곡

 

 

맑고 깨끗한

 

 

감로수도 한 잔 마시고 슬슬 천은사로 들어간다.

 

 

천왕문으로 오르는 계단

 

 

 

사천왕

 

 

동서남북의 사방에서 부처의 법을 지키는 수호신.

원래는 고대 인도에서 세계의 수호신이었던 것을 불교가 수용한 것이다. 동방의 지국천왕(持國天王), 남방의 증장천왕(增長天王), 서방의 광목천왕(廣目天王), 북방의 다문천왕(多聞天王) 등이다. 저마다 권속을 거느리고 있는 이 사천왕은 힌두교의 사방 수호신과 내용상 동일한 관념을 채택한 것이나, 신의 명칭에서 그 원어까지 동일하지는 않다. 아비달마(阿毘達磨) 불교가 확립한 세계관에 의하면 세계의 중앙에 우뚝 솟은 수미산의 정상에는 도리천(利天)이라 불리는 신들의 세계(33천)가 있고, 이 수미산의 중턱을 둘러싸고 사방에 사천왕의 세계가 있다. 도리천의 우두머리 신이 제석천(帝釋天:힌두교의 인드라)인데, 불교에서는 사천왕이 모두 제석천의 명을 받아 천하를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의 동작을 살펴 보고한다고 믿었다. 본래 사천왕의 형상을 표현하는 데 정해진 외모는 없었으나, 중국으로 전래되는 과정에서 무장한 장군의 모습으로 변화되었다. 각 절의 사천왕문에서 보이듯 갑옷을 두르고 무기 등을 들고서 발로 악귀를 밟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는 것이 통례이다. 북방을 수호하는 다문천왕만을 따로 신앙하는 경우도 간혹 있는데, 이 경우에는 비사문천(毘沙門天)이라 불린다.

 

 

왼쪽의 보제루와 오른쪽의 운고루.

 

천왕문을 지나 마당으로 나가면 정면으로 2층으로 지어진 누각이 당당하게 서 있는 보제루의 모습이 보인다. 보제루란 대중의 법요식(法要式) 집회소로 사용하는 건물이다. 이 건물은 후면만 중이층으로 구성한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집입니다. 강당형식으로 내부는 우물마루를 깐 대청형식으로 꾸몄다. 현판은 1934년 호남명필 이삼만(李三晩)이 썼다. 이 현판 글씨는 단아한 보제루와 잘 어울리고 있다.

 

천은사는 대체로 아기자기하고 예쁘다.

 

 

운고루

 

 보제루 오른쪽으로 도량의 중정(中庭-한 가운데 정원)으로 오르는 계단이 있고 그 계단을 오른쪽 축대 위에 운고루(雲鼓樓)가 있다. 보통 루(樓)형식으로 예불시에 치는 사물이 걸려 있으며 흔히 범종루(梵鐘樓) 또는 종고루라고도 한다. 이 종각에는 예불이나 행사시에 치는 사물(법고·운판·목어·범종)이 있는데 조석 예불시에 연주하여 그 소리를 통해서 세상에 모든 생명이 있는 것들을 구제하고자 하는 대승불교의 큰 의미가 담겨져 있다.

 

 

극락보전.

 

 보제루 맞은 편에는 극락보전이 있다. 극락전 혹은 극락보전은 서방정토 극락세계의 교주이시며 중생들의 왕생극락을 인도하시는 아미타부처님과 그 협시보살들을 모신 법당이다. 사찰에 따라서 미타전, 아미타전, 무량수전, 수광전이라고도 하는데 천은사는 대웅전 대신 극락보전이 사찰의 주된 전각이다. 극락보전은1774년 혜암선사가 중수하면서 세운 전각으로서 조선 중기 이후의 전통적 다포계 양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현재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 50호로 지정되었다. 높직한 방형의 장대석으로 기단을 마련하고 그 위에 민흘림의 둥근 기둥을 올렸다. 전체적으로 아담하면서도 장엄한 느낌을 준다.

 

 

천은사 극락보전.

 

 

극락보전 내부의 탱화와 불상.

 

안에는 불단에 아미타여래를 중심으로 관음, 대세지보살이 협시한 삼존불상이 있고 그 뒤에 보물 제924호인 아미타후불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그 밖의 불화로는 삼장탱화, 신중탱화 및 후불벽화로서 수월관음도가 있는데, 삼장탱화는 1776(영조52)에, 신중탱화는 1833년(순조33)에 봉안된 것이다

 

 

불상과 탱화.

 

극락보전에는 아미타부처님과 그분의 협시보살로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 혹은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이 모셔진다.일찍이 아미타부처님이 법장비구로 수행하던 시절에 그 유명한 48대원을 세워 온갖 괴로움을 없애고 모든 것이 아름답기 그지없는 서방의 극락정토를 건설하셨다고 한다. 그때 세웠던 서원에 따라 누구나 일념으로 ‘아미타불’이란 명호만을 불러도 극락에 왕생시켜 괴로움을 물리치고 불도에 정진할 수 있도록 해주시는 대자대비하신 분이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에서 아미타불신앙은 예로부터 사후신앙과 관련하여 서민들의 마음 속에 깊이 자리잡아 왔다. 따라서 전국의 사찰에는 아미타부처님이 석가모니부처님 다음으로 많이 모셔져 있다. 아미타부처님은 설법인을 취하고 있거나 미타정인(九品印)이라고 부르는 다양한 수인을 하고 계신다.

 

 

팔상전과 응진전

 

관음전 바로 옆에 있는 팔상전은 정면 3칸 옆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서 1774년 무렵에 처음 세워진 건물로 알려져 있다. 안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단독으로 모셔져 있으며 그 밖에 근래에 봉안된 영산후불탱화 및 팔상도 4폭이 있다.

[전문적인 설명] 팔상전은 최근에 중건된 정면 3칸, 측면 2칸의 전각이다. 막돌로 석축겸 기단을 조성하고 그 위에 원통형 두리기둥을 세우고 포작을 올렸으며 공포형식은 내, 외 2출목의 다포양식으로 쇠서 단부를 날카롭게 처리하였다. 주간포(柱間包)는 각 간 모두에 1구씩 배치하였다. 가구는 양측면으로부터 충량을 걸은 5양형식이다. 지붕은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팔상전은 석가모니부처님의 생애인 여덟장면을 탱화나 존상으로 모신 곳인데, 팔상 탱화를 봉안하고 달리 존상을 모실 경우에는 석가모니부처님과 함께 좌협시에 미륵보살, 우협시에 제화갈라보살을 모신다. 미륵보살은 석가모니부처님으로부터 수기를 받아 미래에 사바세계에 출현하여 부처님이 되실 분이고 제화갈라보살은 본래 정광불로서 아득한 과거 석가모니부처님이 수행자이던 시절 석가모니부처님이 장래에 부처님이 될 것이라고 수기를 주신 부처님이다. 따라서, 석가모니부처님과 더불어 이 두 협시보살은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를 상징하고 있는 이른바 시간삼세불인 것이다

  

 

옆지기가 작은 키로 뒷꿈치를 올리고 돌탑 위에 작은 돌을 올리고 소원을 빌고있다.

 

불교신자도 아니면서 사찰에 오면 .....

 

 

소원을 비는 돌...

 

 

천은사 뒤로는 이렇게 아름다운 소나무가 버티고 있다.

 

 

삼성전 옆으로 나있는 돌담길.

 

 

진영각 옆으로는 요사채로 가는 길인데 템플스테이를 하고 있다.

 

 

 요사채로 가는 다리 밑으로 흐르는 계곡물.

 

 

요사채와 선방

 

 

요사채에서 진영각으로 건너는 다리 

 

 

천은사 범종.

 

 

기와 시주 하는 곳.

 

 

뒤로 수홍루와 일주문이 보인다.

 

천은사는 화엄사,쌍계사와 함께 지리산 3대 사찰로 꼽히고 있을 정도로 아름다운 사찰이다. 

 

 

천황봉으로 종주하는 등산객들은 등산베낭이 무겁고 커보이고 우리같이 달랑 노고단이나 아니면 반야

 

봉으로 갔다 다시 내려오는 등산객을 거의가 가벼운 차림이다.

 

땀이 거의 식었으니 녹차 한 병을 사들고 다시 노고단정상 자연관찰로로 출발.

 

 

노고단 정상까지는 가파른 길이 0.36키로에 15분이 소요된다고 하는데 위를 올려다보니 안개로 흐리다.

 

 

노고단 정상으로 가기 전의 돌탑이 있는 노고단고개에서 노고단 정상 자연관찰로로 가는 길의 문이 열리

 

기를 기다리고 있다.

 

문이 열리는 시간을 모르고 올라왔는데 정상으로 향하는 문은 열 시에 열린다고 하는데 일찍 왔으면 기

 

다리느라 열이 받을뻔 했다. 

 

 

노고단고개에 있는 돌탑.

 

 

싸~랑~해...

 

 

나무계단으로만 다녀야하고 저 멀리 뽀족하게 보이는 곳이 바로 노고단정상 자연관찰로로 오르는 길.

 

0.5키로에 10분이 걸린다.

 

 

다시 계속해서 나무계단을 오른다.

 

 

숨이 차서 잠시 쉬면서 녹차도 한 모금 마시고

 

 

나무계단이 끝없이 이어진다.

 

 

안개 속을 걷고 걸어서

 

 

드디어 노고단 전망대에 올랐다.

 

 

전망대 아래로는 안개....

 

 

왼쪽으로 노고단 정상으로 오르는 나무계단이 보인다.

 

 

정상이 보인다.

 

 

노고단 정상석(1,507m)

 

최고봉인 천왕봉(天王峰:1,915m)을 주봉으로 반야봉(盤若峰:1,732m)·노고단(老姑壇:1,507m)이 대표

 

적인 3대고봉이다.

 

과음을 한 탓인지 여기까지 오는데 땀을 비오듯이 쏟아서 힘이 든다. 헥~헥~헥..

 

 

정상에 있는 경계점.

 

 

디카를 난간에 세우고 자동촬영.

 

 

날이 맑아진다.

 

 

난간 기둥에 세우고 자동촬영. 

 

 

천왕봉은 1박 2일 코스라는데 천왕봉으로 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노고단정상은 그냥 지나친다.

 

 

등산객이 별로 없어서 계속 놀았다.

 

 

노고단 정상으로 가는 출입문.(열시에 개방한다)

 

 

팔뚝은 안개에 젖었는지 아니면 땀인지...

 

 

노고단대피소는 안개에 젖어있다.

 

 

비탈길...

 

 

흐르는 땀을 계곡물로 씻고

 

 

머리에도 찬물을 뿌려서 열을 식히고

 

 

파워워킹으로 서둘러 내려간다.

 

 

성삼재로 내려왔다.

 

 

성삼재 아래는 운무가 깔리고

 

 

노고단 등산 마무리로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천은사로 출발.....

 비가 엄청나게 쏟아지는 17번국도로 구례에 들어서고 숙소인 산동면 지리산온천 지역을 찾느라 옆지기

 

와 둘이서 신경을 곤두세우고 밤 열 시경에야 숙소에 여장을 풀었다.

 

하늘이 돕는다고 생각을 했다. 만약에 보성녹차밭이나 여수를 구경할 때 비가 그리 쏟아졌다면 그렇게

 

다니지 못했을 텐데 정말 다행이었다. 

 

차를 숙소 주차장에 세우고 숙소에 짐을 옮겨두고는 밖에서 간단하게 소주를 마시고 숙소에 들어가면서

 

맥주를 사서 세 병을 마시고 일찍 잠을 청했다. 

 

아침에 눈을 뜨니 비는 내리지 않으니 오늘은 노고단을 올라가 보려고 서둘러 아침을 라면으로 해결하고

 

밖으로 나섰다.

 

 

노고단으로 가는 길인데 멀리 산 아래로 안개가 자욱하다.

 

 

노고단과 천은사로 가는 길.

 

 

노고단으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성삼재에 차를 주차시키고 가야 하는데 온통 안개로 산 아래가 보이지 않는다. 

 

 

성삼재휴게소에서 노고단대피소까지는 3.3키로에 55분이 걸리고 노고단대피소에서 노고단정상까지는

 

0.36키로에 15분이 소요되니 도합 3.66키로에 70분이이 걸린다고 하는데 날씨가 후덥지근해서 ....  

 

 

지리산 역시 물이 많다.

 

 

도로 옆으로 흐르는 배수로에는 물이 콸콸콸 흘러서 산 길을 걷는 이의 귀를 즐겁게 한다.

 

 

습도가 높아서인 숨이 콱콱 막히고 땀은 비오듯...

 

 

노고단으로 오르는 길의 전망대에서 보니 이 밑으로 화엄사에서 노고단으로 오르는 등산로가 있는데 길

 

이 엄청 가파른 것 같다. 역시 안개로 산 아래는 보이지 않는다.

  

 

노고단대피소까지는 이런 길이 주욱 이어진다.

 

 

길 옆으로는 이런 계곡도 자주 보여서 흐르는 땀을 씻을 수 있다..

 

 

발싸게.

 

 

안개가 흐르는 계곡에서

 

 

어제(목.19일) 내린 비로 물이 많았는지 아무튼 산 위에서 안개에 쌓여서 물이 흐르는데 사진으로 표현하

 

는 것이 한계가 있다.

 

 

계곡물......

 

너무 깨끗하고 얼음같이 차갑다.

 

 

바위틈에서 비집고 싹을 틔운 고사리

 

 

아침이슬이 잎에 매달려서 떨어지기 일보 직전이다.

 

 

이름 모르는 꽃...

 

 

나무의 줄기의 색이 .....

 

 

드디어 노고단대피소에 도착을 했는데 날이 덥고 후덥지근하고 어제 저녁에 먹은 술이 땀으로 나오는지

 

몸은 온통 땀으로 범벅이 되었고 숨이 점점 거칠어진다.

 

거참 이상하게 힘이 드네..헥.헥..헥

 

옆지기는 담배를 피우지 말아라. 술도 먹지 말아라.배둘레햄을 줄여라 등등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노고단대피소 옆으로는 지금 식수대와 식사를 할 공간을 짓고 있는지 허름하게 건물이 올라가고 등산객

 

들의 밥짓는 냄새와 라면 끓이는 냄새가 솔솔풍기니 입맛이 당긴다.

돌산대교가 보이는 전망 좋은 곳에서 내려와 차를 오동도로 몰았다.

 

오동도

여수시 동남단에 조성된 신항(新港)에서 약 1㎞ 떨어져 있다. 1935년에 준공된 연장 1,213m(동쪽 445m, 서쪽 768m)의 방파제로 육지와 연결되었다. 멀리서 볼 때 마치 오동잎처럼 보이고, 오동나무가 빽빽이 들어서 있다 하여 오동도라 했다고 한다. 또한 신이대나무(시누대라고도 함)가 섬 전체에 자생하여 죽도라고도 부른다.

섬 전체가 높이 100m 내외의 완만한 구릉지를 이룬다. 해안은 대부분 암석해안으로 소라바위·병풍바위·지붕바위·코끼리바위·용굴 등으로 불리는 기암절벽이 절경을 이루고 있다. 온난하고 비가 많은 지역으로 다양한 난대성 식물이 자생한다. 동백나무·신이대나무·후박나무·예덕나무·광나무·돈나무 등 총 193종의 수목이 자란다. 해삼·멍게·소라·성게·전복 등과 도미·민어 등이 잡힌다. 이 섬은 임진왜란 당시 수군 연병장으로 이용되었으며, 당시 이순신 장군이 신이대나무로 화살을 만들어 10만 여 명의 왜군을 물리쳤다고 한다. 여수시박물관을 비롯하여 동백림·죽림 등의 식물경관과 기암절벽의 해안경치 및 해돋이 광경이 한 폭의 그림 같아 1968년 한려해상국립공원의 일부로 지정되었다. 섬 남단에 오동도 등대가 있으며, 관리사무소와 교통부의 표지기지창(標識基地廠)이 있다. 면적 0.12㎢, 해안선길이 14㎞, 
 

 

입구에서 오동도까지는 동백열차가 운행을 하는데 벌써 떠나고 없어서 슬슬 걸어서 오동도로 들어갔다.

 

오동도로 들어가는 방파제

 

 

여수항으로 들어오는 배가 보인다. 

 

 

방파제가 보이는 이 길을 걸어서...

 

 

숲이 무성해서 어둡고

 

 

밝고 

 

 

용굴에서 핸드폰으로 통화중인데 옆지기가 디카질을 했다.

 

 

여기가 용굴이란다.

 

 

오동도의 등대

 

 

등대의 기원 

 

 

등대가 있는 곳은 대나무로 둘러싸여 있다.

 

 

오동동등대에 올라

 

 

오동도등대에서

 

 

등대 앞바다.

 

 

분수에서 물이 솟는다.

 

 

조명속에서 물이 솟는다.

 

 

오동도 선착장.

 

 

거북선

 

 

오동도 안내도.

 

자 이제는 갑시다.

 

 

 

 

여수 횟거리를 파는 도로변에는 이런 풍경도 보인다. 

 

소변금지.

 

왠지 어두운 밤에 술 한 잔을 걸치고는 바지의 자크를 내리고 깨진 블럭사이로 시원하게 내 뿜고 싶은

 

그런 풍경이다.

 

 

17번 국도로 올라서서 순천을 지나는데 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앞이 보이지 않는다.

 

언제 구례에 가나 언제.... 

 

 늦은 점심을 배가 터지도록 먹고는 돌산대교로 차를 몰았다.

 

약국에 들러서 소화제와 활명수로 꽉 차있는 배도 달래면서... 미련하기가 하늘을 찌른다.

 

여수에 와서 흥미가 있는 것은 다른 관광지와는 달리 길가에 전망이 좋은 곳이라는 안내판이 서 있어서

 

그 안내판을 보고 찾아가면 여지없이 전망이 좋은 곳을 만난다는 것이다.

 

 

돌산대교를 건너기 위해서는 직진. 

 

전라남도 여수시 남산동과 돌산읍 우두리를 연결한 다리로 국도 17호선상에 있다.폭이 11.7M 길이가
 
450M로 1980년에 착공해 1984년도에 완공했다.
 
돌산대교에는 여수항에 입항하는 출항하는 대형선박을 위해 양쪽 해안에 높이 62M의 교각을 설치하여
 
 직경 56~87㎜ 정도의 강철 케이블 28개로 교판을 묶어 무게를 지탱하게 하는 특수공법으로 시공되었다.
 
특히 상부구조는 강상형 들보를 가진 3경간 연속교로 주탑은 A자형, 케이블 배치는 방사형이며 하부구조
 
는 2기의 교각으로 되어 있다. 교탑의 기초는 압축공기 케이슨 공법을 도입하여 해저암반층까지 침하시
 
킨 대형 우물통을 기초로 한 철근 콘크리트 교각 위에 세웠다. 다리가 개통되기 전에는 돌산도 주민들이
 
배를 타고 여수시내로 통행하는 불편을 겪었으나, 현재는 농산물의 출하는 물론 학생·주민의 통행도 편
 
리해졌다. 또한 차량운행비 절감과 통행시간 단축으로 관광객들의 교통편도 더욱 편리해졌다.

 

 

돌산대교를 지나며 남해바다를 보니 안개가 자욱하다.

 

 

돌산대교를 건너서 좌회전을 했는데 전망 좋은 곳이라는 안내판을 보고서 이리로 올라왔다.

 

 

어업인위령탑이 세워져 있고

 

 

사진을 찍을 때는 언제나 까분다. 나이가 ..... 얼마인데.....

 

 

돌산대교를 정면에서 찍었더니 다리의 기둥이 겹쳐서 하나만 보인다.

 

 

안개로 바닷가 풍경이 흐리다.

 

 

돌산대교 옆에는 이런 섬이 있는데 우측 아래로 보이는 빨간 기와지붕이 촬영세트장이라고 한다.

 

 

언제 이런 드라마가 방영되었는지  

 

 

세트장으로 지어진 집의 마당에 들어서니 한 눈에 돌산대교와 바다가 보인다.

 

 

세트장 마당에서 돌산대교를 배경으로 

 

 

우측을 내려다 보니 한가롭게 배들이 떠 있다. 

 

 보성에서 녹차밭을 구경하고 여수로 가면서 배꼽시계가 우는데 여수는 돌게로 만든 게장백반집이 유명

 

하다니 꼭 먹어보려고 여행을 떠나기 전에 미리 위치를 관광안내도에 표시를 해 두었었다.

 

옆지기는 차에 네비게이션을 달자고 그 전부터 얘기를 했는데 여행의 묘미는 길을 찾아서 가는데 있는데

 

무슨 네비가 필요하냐고 했었다. 못 찾으면 무슨 망신.....

 

17번 도로로 운전을 하면서 드디어 여수시로 들어섰는데 돌산대교를 가기 전에 우측으로 빠져서 횡단보

 

도에 서 있는 아주머니에게 물어 보니 이 길로 조금 가다가 다시 물어 보란다.

 

가다가 운좋게 원광한방병원의 이정표가 보여서 잽싸게 1차선으로 들어가서 좌회전을 하려고 서있는

 

데 골목길에 황소식당의 간판이 보인다.

 

보조네비인 옆지기가 "우와 박네비 화이팅..."하고 외친다.

 

그래 이 맛에 네비게이션이 없이 길을 따라서 여행을 하는거야.

 

 시간이 벌써 오후 두시 반이다...

 

 

백반정식이 중학생이상은 5,000원 초등학생까지는 3,000원 

 

 

드디어 게장백반이 차려졌다. 게장은 먹다가 부족하면 더 준다고 하는데 게장을 정말로 많이 준다.

 

가운데에 빈 자리는 뭘까요. 

 

 

돌게 간장게장이 냉면 대접으로 가득....

 

 

돌게 양념게장도 냉면 대접으로 하나 가득...

 

 

비어있던 상의 가운데에는 조기매운탕이 등장했다.

 

 

국물을 떠서 먹어보니 얼큰하고 두부를 먹으니 완전 시골두부....

 

매운탕도 깔끔.

 

자 이제 반찬은

 

 

멸치로 만든 젓갈.

 

 

갓김치.

 

 

열무김치.

 

 

멍게젓갈.

 

 

식탁의 좌측

 

 

그리고 우측

 

 

밥그릇도 어찌나 크고 많이 주는지..

 

 

새우로 만든 간장새우?

 

 

묵은지.

 

 

파무침.

 

 

버섯.

 

 

브로콜리.

 

 

가오리 회무침.

 

 

김 파래무침.

 

 

젓갈에 싸서 먹으라고 배추속도 나오고

 

 

내가 먹은 게장의 잔해들....너무 맛이 있어서 정말로 무지막지하게 먹어치웠다. 

 

 

공기밥도 하나 추가해서 옆지기와 싹 비우고

 

 

간장게장도 싹쓸이 했는데 간장게장이 짜지도 않고 게장국물이 너무 맛있었다.

 

 

옆지기는 아직도 숫가락질을 하고 있다. 평상시에는 밥 한공기이면 땡인 사람인데...

 

더구나 밥공기의 양이 장난이 아닌데 한공기를 추가해서 반을 더 먹다니 아무래도 소화제가 필요 할 것

 

같은 분위기로 가고 있다.

 

 

싸고 푸짐한 집 "황소식당"

 

 

식당을 나서며 커피도 한 잔 마셔주고

 

 

식당 바로 앞에는 게장판매장이 별도로 있어서 판매도 하고 택배로 배달도 한다.

 

 

늦은시간이라서 그런지 운좋게 식당주차장에 주차 할 수 있었다. 

 

 

원광한방병원 바로 옆에 황소식당이 있다.

 

정말 맛있고 가격이 싼데 놀라는 집이다. 

 

 숙박을 할 곳이 구례에 있는데 가는 길에 보성녹차발을 보고 싶어하는 옆지기 때문에 동광주IC에서 근

 

한 시간을 달려서 보성으로 들어섰다.

 

 

녹차밭으로 가는 길에는 메타세콰이어 가로수가 길에 주욱 늘어서 있다.

 

 

 

첫 번째로 만나는 봇재다원 입구.

 

 

산비탈에 차밭을 만들어 놓았다.

 

 

부산에서 온 관광객들이 녹차 만드는 체험을 하고 있다.

 

 

사진 찍을 때는 싸우지 말고 다정하게 .....

 

 

여기는 보성제1다원인데 베란다에서 내려보는 풍경이 거의 예술이다.

 

 

푸른 녹차밭을 내려다 보고 있으니 가슴이 확 트이는 그런 느낌이다.

  

 

정말 녹차밭을 아름답게 가꾸어 놓았다.

 

 

율포항 풍경.

 

 

방파제에서 율포해수욕장을 바라보며

 

 

보성2다원.

 

 

보성2다원은 봇재나 보성1다원과는 달리 거의 평지에 녹차밭을 만들어 놓았다.

 

 

안개가 자욱하게 깔려서 더욱 운치가 있다. 

 

 

여수로 가기 위해서 율포해수욕장에서 차를 돌려서 나오다 보성까지 와서 녹차를 안마시고 가면 후회한

 

다고 해서 보성1다원이 내려다 보이는 전망이 좋은 집에서 녹차를 마시려고 들어왔다.  

 

 

녹차의 은은한 향이 베란다에 퍼진다.

 

 

녹차로 만든 양갱.

 

 

녹차는 평상시 마시던 티백으로 된 녹차보다 향이나 맛이 월등하다.

  

 

리필도 가능하지만 녹차로 배를 채울일은 아니니...

 

 

뭐가 좋은지 싱글싱글...

 

 

아래층은 민박으로 사용하는지 데크에 탁자와 고기구이판도 보인다.

 

 

녹차 두 잔에 6,000원

 

 

 

 

찻집 내부 모습.

 

 

"초록잎이 펼치는 세상" 전망이 좋은곳에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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