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사는 천은사에서 그리 멀지않은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에 있는 화엄사는 544년(백제 성왕 22년)에 연기 조사가 창건하였다하며 절의 이름은 화엄경(華嚴經)의 화엄 두글자를 따서 붙였다고 한다. 처음에는 해회당(海會堂)과 대웅상적광전(大雄常寂光殿)만 세워졌고 그후 643년(선덕여왕 12년) 자장율사에 의해 증축되었고 875년(신라 헌강왕 1년)에 도선국사가 또다시 증축하였으나 임진왜란때 불타 없어진 것을 1630년(인조 8년)에 벽암선사가 절을 다시 세우기 시작하여 7년만인 인조 14년(1636) 완성 하였다.
사찰내에는 각황전을 비롯하여
국보 4점, 보물 5점, 천연기념물 1점, 지방문화재 2점등 많은 문화재와 20여동의 부속건물이 배치되어 있다. 특히 건물의 배치에 있어서는 일주문을 지나 약 30°로 꺽어서 북동쪽으로 들어가면 금강역사(金剛力士), 문수(文殊), 보현(普賢)의 상을 안치한 천왕문에 다다르는데 이문은 금강문과는 서쪽방향으로 벗겨놓는데 독특한 특징이다.

 

 

화엄사 입구

 

 

천은사로 흐르는 계곡보다 물이 많고 더욱 수려하다.

 

 

신라 문무왕때 의상대사가 건립.

 

 

사찰의 규모가 천은사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크다. 건물이 33개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웅전으로 가는 길인데 공사중이라서 다소 소란스럽고 천은사에 비하면 건물이 많아서인지 다소 답답

 

하게 느껴지지만 웅장하고 고풍스러운 맛이 있다.

 

 

 

 
화엄사 대웅전
 
화엄사에 있는 조선 중기의 목조건물. 보물 제299호. 〈사적기〉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36년 벽암대사가 중건했다고 한다. 앞면 5칸, 옆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높은 석단 위에 남향으로 세워졌다. 기둥은 배흘림으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배치했으며 기둥 위와 사이에는 공포가 짜여져 있는 다포계 형식이다. 공포는 내외3출목으로 외부에는 쇠서[牛舌] 끝이 잘려 단순한 형태로 되어 있고, 내부의 살미첨차[山彌遮]는 초화형(草花形)으로 장식되는 등 조선 중기 목조건축의 특징을 보여준다. 앞면에는 정자무늬와 빗살무늬로 된 삼분합(三分閤)이 달려 있으며 그 위에는 교창(交窓)을 두어 건물이 높은 편이다. 내부에는 우물마루를 깔았으며 천장은 우물천장으로 외둘레간보다 한층 높게 만들었다. 불단 뒷면과 좌우에는 각각 2, 3개의 고주를 세워 대들보를 받치게 했으며, 불단 위에는 비로자나삼존불상이 안치되어 있고 1757년(영조 33)에 제작된 후불탱화가 있다. 이 불상 위로는 각각 J자 형의 처마로 된 정교하고 장식적인 닫집이 있다.

 

 

화엄사 동 오층석탑.

 

이름 : 화엄사 동 오층 석탑(華嚴寺 東 五層 石塔)
문화재 : 보물 132호
소재지 : 전라남도 구례군 화엄사
제작시기 : 통일 시날 시�(9세기)

화엄사 대웅전 앞에는 동서로 쌍탑이 서 있다.
그 중에 동쪽에 서있는 것이 이 탑으로 크기는 서로 비슷하지만
서탑이 조각과 장식이 화려한 반면, 동탑은 아무런 장식없이 단정하다.
탑은 1층 기단위로 5층의 탑신을 올린 형태로,
서탑의 기단이 2층인 것과 조금 다른 모습이다.
기단의 각 면에는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을 본뜬 조각을 두었다.
탑신는 1층 몸돌이 높이에 비해 넓어 안정감이 있다.
또한 각 층 몸돌의 너비가 줄어드는 정도는 큰 것에 비해
높이의 줄어드는 정도가 적어 늘씬해 보인다.
지붕돌은 매우 평평하고 얇은데 몸돌을 따라 너비의 줄어드는 정도가 큰 편이며,
그 중 1층과 2층의 차이가 한층 크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과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이 있고,
다시 사잇기둥을 두어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가 올려져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탑이 2층 기단인데 비해 1층 기단으로 되어 있고,
기단부의 돌구성이 다소 느슨해진 경향이 있는 점으로 미루어
만들어진 시기는 서탑과 비슷한 9세기경으로 짐작된다.

 

 

대웅전 앞에는 같은 규모의 오층석탑이 있다.(화엄사 동 오층석탑과 서 오층석탑)

 

서 오층석탑.

화엄사 대웅전 앞에 동·서로 있는 쌍탑 가운데 서편에 자리하고 있는 탑으로, 동탑이 아무런 조각이 없는 반면 서탑에는 조각과 장식이 가득하다.
형태는 기단(基壇)은 2층이고, 그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세워져 있다.
아래층 기단 각 면에는 안상(眼象) 속에 12지신상(十二支神像)을 방향에 따라 배치하였고, 윗층 기단은 각 면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모양을 본떠 새겼으며, 나뉜 두 면에는 8부신중(八部神衆)을 조각하였다.
탑신의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돌이며 몸돌에는 각 층 모서리에도 기둥모양을 본떠 새겨 두었다.1층 몸돌 4면에는 4천왕상(四天王像)을 조각 배치하였다.
지붕돌은 각 층마다 밑면에 5단의 받침을 갖추고 처마밑은 수평이 되게 하였다.
머리장식에는 2층의 단을 둔 받침 위로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가 놓여 있다.
석탑의 형태는 높고 가파르면서도 상하의 체감비율이라든지, 지붕돌을 경쾌하게 처리한 수법 등이 잘 조화되어 우아한 기품을 지니고 있다.
특히 아래층 기단의 12지신상 조각은 석탑에서 흔하지 않은 예의 하나이다.
위·아래층 기단과 1층 몸돌 세 곳에 나타난 조각상은 그 배치에 보다 신중을 기하였고 특히 12지신·8부중·4천왕 모두 불교의 수호신적 기능을 지닌 조형물이라는 점에서 탑 안에 모셔진 사리를 보호하려는 의도가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조각상을 각 부분에 새긴 점이나, 지붕의 조형이 보다 유연한 느낌을 주는 점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석탑 남쪽으로는 안상과 연꽃이 조각된 배례석이 놓여 있다

 

 

화엄사 내부 풍경.

 

 

웅장함을 자랑하는 각황전

 

화엄사에 있는 조선 후기의 목조건물. 국보 제67호. 원래 의상법사가 670년에 건립한 3층 장륙전으로 장륙존상(丈六尊像)을 봉안했으며 사방 벽은 화엄석경으로 장엄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99~1702년에 성능대사가 중건했으며, 1930년대에 일본인에 의해 중수되었는데 이때 건물의 일부가 약간 변형된 것으로 보인다. 앞면 7칸, 옆면 5칸의 중층 팔작지붕 건물로 높은 석조 기단 위에 서향으로 세워졌다. 기둥은 평주이며 기둥머리 위에 창방(昌枋)과 평방(平枋)이 놓여 있다. 평방 위와 기둥 사이에 공포를 짜올린 다포계(多包系)이며 상하층 모두 내외2출목(內外二出目)으로 되어 있다. 첨차는 아랫면이 둥글게 처리되었고 쇠서의 끝이 모두 위로 올라가 활처럼 생겼는데 이러한 특징은 조선 초기 목조건축에서 많이 볼 수 있다. 1층 앞면에는 빗살무늬와 솟을살무늬로 장식된 살문을 달고 옆면과 뒷면은 일부만 벽으로 막았다. 2층은 사방에 모두 작은 창을 달았다. 내부는 통층(通層)으로 공간이 넓으며 고주(高柱)를 사방에 배치하고 그 위에 대들보로 종량(宗樑)의 한쪽 끝을 받치고 있다. 천장은 우물천장이며 그 주위에 경사진 빗반자가 있는 점이 특이하다. 중앙의 뒤쪽으로는 대불단 위에 석가불·아미타불·다보불(多寶佛)이 있고 그 좌우에 보현보살·문수보살·관음보살·지적보살(知積菩薩)이 있다. 이 불상·보살상들은 3m가 넘는 거대한 불상으로 도금불사 때 발견된 복장기(腹藏記)에 의해 1703년(숙종 29)에 조성되었음이 확인되었다. 또한 불단 밑에는 임진왜란 때 파손된 1,500여 점의 석경이 봉안되어 있다.

 

 

각황전 내부의 기둥이 오래된 연륜을 보여준다.

 

 

각황전 내부의 불상들.

 

 

대웅전과 화엄사각황전 앞 석등을 을 배경으로 찰~칵.

 

화엄사 각황전 앞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석등. 국보 제12호. 높이 636cm. 기단부·화사석(火舍石)·상륜부를 모두 갖춘 완전한 형태의 팔각석등으로 현존하는 우리나라 석등 가운데 가장 크다. 하대석의 각 면에는 안상(眼象)을 새기고 그 위에는 귀꽃이 장식된 8엽의 복련(覆蓮)을 돌렸으며 연화대 위에는 다시 구름무늬와 8각 굄이 있다. 간주석(竿柱石)은 고복형(鼓腹形)으로 전형적인 팔각석등과는 약간 다르며, 배가 볼록하게 나온 중앙에는 2줄의 띠를 돌렸는데 그 위에 8개의 꽃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이러한 형태는 통일신라시대의 실상사석등·선림원지석등·임실용암리석등·개선사지석등(891) 등 전라도지방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상대석의 밑에는 8엽의 앙련이 조각되어 있고 위에는 8각의 소로형 굄이 있다. 화사석은 4면에 화창(火窓)을 내었으나 다른 면에는 아무런 장식문양도 없다. 옥개석은 얇은 편으로 각 모서리에는 직립한 귀꽃 장식이 크게 표현되었으며 추녀는 수평으로 되어 있다. 상륜부는 높은 노반(露盤), 앙화(仰花), 보륜(寶輪), 귀꽃이 장식된 보개(寶蓋)를 차례로 얹고 정상에는 다른 석탑과 마찬가지로 높은 간주가 달린 보주(寶珠)로 장식했다. 이 석등은 기단보다 상륜부가 크고 폭이 넓어 비례가 맞지 않고 조각수법도 둔중한 느낌을 주지만, 전체적으로 거대한 크기에서 오는 장중함으로 볼 때 통일신라 말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

 

화엄사 각황전 서남쪽의 효대(孝臺)라고 부르는 높은 언덕 위에 있는 신라시대 3층석탑. 국보 제35호. 높이 550cm. 〈사적기〉에 의하면 자장율사가 연기조사의 효성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일종의 불사리 공양탑이라고 한다. 그러나 석탑의 양식으로 보아 조성연대가 7세기 중엽까지 올라간다고 볼 수 없다. 이 석탑은 2층 기단에 3층의 탑신이 놓여 있으나 상층기단이 특이하게 사자상으로 되어 있어 이형석탑(異形石塔)에 속한다. 지대석 위에는 3단의 높은 굄이 하층기단을 받치고 있으며 하대석의 각 면에는 우주를 조각하고 그 사이에 안상을 3구씩 배치했다. 안상 안에는 천인상(天人像)을 조각했는데, 천의자락을 날리면서 연화대좌에 앉아 악기를 연주하거나 춤을 추거나 공양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지물(持物)도 각기 다르다. 상층기단에는 암수 2쌍의 사자를 네 모퉁이에 각각 배치하고 머리 위에 연화대를 얹어 탑신을 받치고 있으며 그 가운데에 합장하고 서 있는 승상(僧像)은 머리로 탑신을 받치지는 않았으나 그 위에 연화무늬를 조각하여 천개를 표현했다. 석사자상은 연화대좌 위에 정면을 보고 앉아 있는데, 입을 벌린 채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고 있어 사실적으로 표현되었으며 각각 표정이 달라서 인생의 희로애락을 나타낸 것이라고 한다. 또한 승상은 연기조사의 어머니인 비구니라고 하며 이 석탑 바로 앞에 있는 석등 아래쪽에 꿇어앉아 있는 승상은 효성이 지극한 연기조사가 불탑을 받들고 서 있는 어머니께 석등을 머리에 얹고 차공양을 올리는 모습이라고 한다. 상층기단 갑석은 윗면에 약간 경사가 있으며 중앙에는 2단 굄이 있다. 탑신부의 옥신과 옥개는 각각 다른 돌로 이루어졌는데 1층 옥신 4면에는 자물쇠가 장식된 문비(門扉)를 새기고 그 좌우에는 인왕상·사천왕상·보살상이 조각되어 있다. 2, 3층의 옥신에는 우주만 모각되어 있다. 옥개석은 5단의 층급받침으로 낙수면이 평박하고 처마 끝부분에서 예리하게 반전되어 있어 경쾌한 느낌을 준다. 옥개석의 각 층 윗면에는 2단의 굄을 두어 옥신석을 받치도록 했다. 상륜부에는 노반·복발만 남아 있다. 이 석탑은 알맞은 체감비율과 옥개석의 경쾌한 반전, 우주 대신 4마리의 사자를 사방에 배치한 점, 하층기단 및 1층 옥신의 뛰어난 조각수법 등에 의해 통일신라시대 전성기인 8세기 중엽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석탑형식은 고려시대의 사자빈신사지석탑(1022)을 비롯하여 홍천물걸리4사자석탑 등으로 이어졌으며 조선시대에도 제작되었다. 

 

 

화엄사 사사자3층석탑

 

 

석탑 앞에는 불두화도 피어있다.

 

 

화엄사 앞으로 흐르는 계곡에서 탁족을 하면서 발의 피로를 풀고

 

 

계곡물에 탁족을 하고...

 

점심을 먹으러 가야 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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