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도 묵밥으로 배불리 먹었으니 이제는 이번 여름휴가의 마지막이 될 부석사로 향했다.

 

거리는 약 14km.

 

부석사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조금 오르다보니 인공폭포가 보인다.

  

 

깨끗하게 조성한 인공폭포와 연못

 

 

물안개가 오르게 만들어 놓았는데

 

 

물안개가 오르는 풍경

 

 

부석사

한국 화엄종()의 근본도량()이다. 676년(신라 문무왕 16) 의상()이 왕명을 받들어 창건하고, 화엄의 대교()를 펴던 곳으로, 창건에 얽힌 의상과 선묘() 아가씨의 애틋한 사랑의 설화는 유명하다. 1016년(고려 현종 7)에 원융국사()가 무량수전(殿)을 중창하였고 1376년(우왕 2)에 원응국사()가 다시 중수하고, 이듬해 조사당()을 재건하였다. 그 후 여러 차례 중수와 개연()을 거쳐 1916년에는 무량수전을 해체 수리하였다.

경내에는 무량수전(국보 18)·조사당(국보 19)·소조여래좌상(:국보 45)·조사당 벽화(국보 46)·무량수전 앞 석등(국보 17) 등의 국보와 3층석탑·석조여래좌상·당간지주(竿) 등의 보물, 원융국사비·불사리탑 등의 지방문화재를 비롯하여 삼성각()·취현암()·범종루()·안양문()·응향각() 등 많은 문화재가 있으며 또 신라 때부터 쌓은 것으로 믿어지는 대석단()이 있다.

의상은 제자가 3,000명이나 있었다고 하며 그 중에서 10대덕()이라 불리는 오진()·지통()·표훈()·진정()·진장()·도융()·양원()·상원()·능인()·의적() 등은 모두 화엄을 현양()시킨 승려들이었다.

이 밖에도 《송고승전()》에 그 이름이 보이는 범체()나 도신()및 신림() 등도 의상의 훌륭한 제자였으며 의상 이후의 부석사와 관계된 고승으로는 혜철국사(무염국사()·징효대사()·원융국사·원응국사 등이 그 법통을 이었다.

 

 

부석사 안내도

 

 

부석사 입장권이 1,200원이니 속리산 법주사의 3,000원보다는 엄청 저렴하다.

 

도대체 유명사찰의 입장료는 어떤 근거에 의해서 금액을 정하는지 모르겠다.

 

 

부석사로 오르는 언덕

 

 

태백산부석사라고 씌인 일주문을 지나고

  

 

천왕문으로 향하는 길

 

 

 

당간지주를 지난다.

 

 

천왕문을 지나면서 보이는

 

 

사대천왕

 

 

모습들

 

 

천왕문을 지나면 삼층석탑이 보인다.

 

 

부석사 풍경

 

 

출입금지란다.

 

부석사도 공사 중.....

 

 

 

부석사 삼층석탑

 

 

부석사 범종각

 

 

 

범종각 아래를 지나서

 

 

 

멀리 안양루가 보인다.

 

 

범종각

 

 

안양루를 지나면

 

안양루

부석사()의 주요 전각인 무량수전(殿, 국보 제18호) 맞은편에 있는 누각으로, 2단으로 쌓은 높은 석축 위에 세워진 정면 3칸·측면 2칸 규모의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누 밑을 통과하여 무량수전으로 들어서게 되어 있어 일종의 누문() 역할도 하는데 전면에서 보면 2층 누각이지만, 무량수전 쪽에서 보면 단층 전각처럼 보인다.

하나의 건물에 누각과 문이라는 이중의 기능이 부여 되어 있어 건물 전면에는 ‘안양루’, 뒷면에는 ‘안양문’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안양()’이란 극락을 뜻하는 말로, 안양문은 극락에 이르는 입구를 상징하고, 안양문을 지나면 나오는 무량수전은 극락을 상징한다. 조선 중기 건물의 특징을 지니고 있는 안양루는 다포식 건물로 기둥은 층단주 형식으로 되어 있고, 2층 내부 바닥은 우물마루, 천정은 우물천정이다.

2층 누각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면 부석사 경내의 전각들이 한눈에 들어오고 멀리 소백산맥의 연봉들이 펼쳐져 있어 경관이 뛰어나다. 예로부터 조선 후기의 방랑시인인 김삿갓 김병연( 1807~1863)을 비롯한 많은 문인들이 안양루에서 바라보는 경치를 노래하는 시문()을 남겼는데 누각 내부에는 많은 시문 현판들이 걸려 있다.

 

 

무량수전 앞 전경

 

 

무량수전

 

 

우리가 도착한 시간이 불공을 드리는 시간이었는지 모두 절을 하며 불공을 외우느라 분위가가 경건하던데

 

무량수전

봉황산 중턱에 있는 부석사는 신라 문무왕 16년(676)에 의상대사가 왕명을 받들어 짓고 화엄의 큰 가르침을 펴던 곳이다.『삼국유사』에 있는 설화를 보면, 의상이 당나라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할 때 그를 흠모한 여인 선묘가 용으로 변해 날아 와 줄곧 의상을 보호하면서 이곳에 절을 지을 수 있게 도왔다고 한다.아직도 무량수전 뒤에는 선묘용이 변화했던 바위로 전하는 ‘부석’을 볼 수 있다.무량수전은 부석사의 중심건물로 극락정토를 상징하는 아미타여래불상을 모시고 있다.신라 문무왕(재위 661∼681) 때 짓고 고려 현종(재위 1009∼1031) 때 고쳐 지었으나, 공민왕 7년(1358)에 불에 타 버렸다.지금 있는 건물은 고려 우왕 2년(1376)에 다시 짓고 광해군 때 새로 단청한 것으로, 1916년에 해체·수리 공사를 하였다.규모는 앞면 5칸·옆면 3칸으로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에만 간결한 형태로 짜올린 주심포 양식이다.특히 세부 수법이 후세의 건물에서 볼 수 있는 장식적인 요소가 적어 주심포 양식의 기본 수법을 가장 잘 남기고 있는 대표적인 건물로 평가 받고 있다.건물 안쪽은 다른 불전과 달리 불전의 옆면에 불상을 모시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무량수전은 우리 나라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중 봉정사 극락전(국보 제15호)과 더불어 오래된 건물로서 고대 사찰건축의 구조를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건물이 되고 있다.

 

 

안양루와 석등

 

 

조사당으로 오르는 길 옆 커다란 바위에 돌 하나를 올리고

 

 

많은 사람들이 무량수전에 들어가거나 박에서 불공을 드리고 있다.

 

 

부석사 경내

 

 

 

부석사 삼층석탑

 

 

조사당으로 오르는 계단에서 만난

 

 

커다란 두꺼비 한 마리는 사람을 봐도 움직임도 없이 꼼짝을 하지 않고 앉아 있다.

 

 

안내판....

 

 

조사당과 선비화라는데

 

 

선비화는 철망에 갇혀서.... 불쌍하더라

  

 

전설따라 삼천리 때문에 ...

신라시대에 의상조사가 창건한 사찰이라고 알려져 있는 부석사()의 조사당(, 국보 제19호) 추녀 밑에 일명 선비화()라고 불리는 콩과 낙엽관목인 골담초 1그루가 있다. <택리지>에는 의상대사가 부석사를 창건한 후 도를 깨치고 서역 천축국(인도)으로 떠날 때 지팡이를 꽂으면서 ‘지팡이에 뿌리가 내리고 잎이 날 터이니 이 나무가 죽지 않으면 나도 죽지 않은 것으로 알라.’고 했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그 나무가 바로 선비화라 한다.

조선 광해군 때에 경상감사가 된 정조()라는 이가 부석사에 와 선비화를 보고 ‘선인의 지팡이였던 나무로 내 지팡이를 만들겠다’라며 나무를 잘라 갔으나 다시 줄기가 뻗어 나와 전과 같이 잘 자랐고, 후에 정조는 역적으로 몰려 죽였다는 내용도 기록되어 있다. 퇴계 이황은 이 나무를 보고 ‘부석사비선화()’라고 하는 시()를 남기기도 했다.

아기를 못 낳는 부인이 선비화의 잎을 삶아 그 물을 마시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이 내려와 나뭇잎을 마구 따 가는 바람에 나무가 많이 훼손되었다 한다. 높이 170cm, 뿌리부분 굵기 5cm 정도 밖에 안 되지만 수령이 최소 500년에 이른다고 알려진 부석사의 선비화는 현재 철책으로 둘러싸여 보호되고 있다.

 

 

조사당

봉황산 중턱에 있는 부석사는 신라 문무왕 16년(676)에 의상대사가 왕명을 받들어 짓고 화엄의 큰 가르침을 펴던 곳이다.『삼국유사』에 있는 설화를 보면, 의상이 당나라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할 때 그를 흠모한 여인 선묘가 용으로 변해 날아 와 줄곧 의상을 보호하면서 이곳에 절을 지을 수 있게 도왔다고 한다.아직도 무량수전 뒤에는 선묘용이 변화했던 바위로 전하는 ‘부석’을 볼 수 있다.조사당은 의상대사의 초상을 모시고 있는 곳으로 고려 우왕 3년(1377)에 세웠고, 조선 성종 21년(1490)과 성종 24년(1493)에 다시 고쳤다.앞면 3칸·옆면 1칸 크기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꾸몄다.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에만 설치한 주심포 양식이며, 건물 자체가 작은 크기이기 때문에 세부양식이 경내에 있는 무량수전(국보 제18호)보다 간결하다.앞면 가운데 칸에는 출입문을 두었고 좌우로는 빛을 받아들이기 위한 광창을 설치해 놓았다.조사당 앞 동쪽 처마 아래에서 자라고 있는 나무는 의상대사가 꽂은 지팡이였다는 전설이 있다.건물 안쪽의 좌우에는 사천왕상·보살상 등 고려 후기에 그려진 벽화가 있었다.이것들은 고려시대 회화 가운데 매우 희귀한 것으로, 고분벽화를 제외하면 가장 오래된 채색 그림 중 하나였다.지금은 보호각을 지어 보관하고 있으며, 원래 벽화가 있던 자리에는 본떠 그린 그림을 놓아 당시 벽화의 모습을 잘 전해주고 있다.

 

 

응진전과

 

 

자인당

 

 

자인당에는 석조여래좌상이 있다는데

 

 

좌측의 석조여래좌상

 

 

우측의 석조여래좌상

 

 

조용한 무량수전을 지나는 옆지기.

 

많은 불자들이 무량수전에 있는데 조용하다. 뭔가 기원을 올리는 시간인가?

 

 

부석사 배흘림 기둥

 

기둥의 가운데가 굵고 위와 아래로 점차 가늘어지는 기둥을 배흘림 기둥이라고 한다.

 

 

부석사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 옆으로 문이 열려 있다.

 

 

이제 여행의 모든 일정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는 시간.

 

오늘도 많이 걷고 많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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