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년산성을 내려와서 이제는 법주사로 향하는 중인데
도로를 달리며 보이는 풍경이 낯설지 않아서 차를 세웠더니 여기가 정이품송 소나무란다.
좌측의 수세가 조금 이상한 것은 폭설 때문에 훼손되어서 그렇다고 하는데...
매점에서 아이스크림을 사고 옆지기를 찍어주고 있는데
매점 주인인 아주머니가 나오셔서 둘이 같이 서라고 하더니 찍어준 사진
사진 경력이 36년이라더니 정말 잘 찍으셨다.
숙소에 차를 세우고 법주사로 향하는 중
관람료가 무려 3,000원이었던가 ...아무튼 비싸다.
유명 사찰의 진입로는 언제나 멋진 풍광을 보여준다.
시원한 숲을 지나니 멀리 법주사가 보인다.
법주사는 공사 중...
유명 사찰은 공사를 하는 곳이 많았는데 어김없이 여기도 공사를 하고 있었다.
금강문을 지나서
일주문을 지나 수정교를 지나면 본격적으로 법주사 가람에 들어서게 되는데 그 첫 입구가 금강문(金剛門)이다. 앞면 3칸, 옆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좌우에는 돌담이 늘어서 회랑을 형성하고 있다. 금강문은 인왕상을 봉안하기 때문에 인왕문(仁王門)이라고도 부른다. 대체로 문 양쪽에는 금강저(金剛杵)나 칼과 창을 손에 들고 있는 금강역사가 모셔진다. 그래서 왼쪽에는 밀적금강(蜜跡金剛), 오른쪽에는 나라연금강(那羅延金剛)을 모시는데, 혹 입을 벌리고 있는 상을 아금강역사(阿金剛力士)라 부르고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을 우금강역사(金剛力士)라 부르기도 한다. 이곳 금강문 안에는 1974년에 조성한 금강역사 2위와 사자를 탄 문수보살, 코끼리를 탄 보현보살을 함께 봉안하였다.
법주사 마애여래의상
마애여래의상(磨崖如來倚像)은 능인전 옆의 추래암(墜來岩) 암벽에 새겨진 고려시대의 마애불상으로서 현재 보물 제216호로 지정되어 있다.
의상(倚像)이란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을 말하지만 여기서는 의자 대신에 연화대좌 위에 앉아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마애불로서 이러한 예는 경주 남산의 삼화령 미륵불이 유일한 작품인데 그 양식상의 특징과 연관지어 미륵불로 추정하고 있다.
전체 높이는 5m로서 머리에 불룩한 나발이 있고 목에 삼도가 표현되었다.
상호는 치켜 올라간 눈 꼬리, 정면을 향한 도식적 귀, 작은 입과 더불어 군살이 보이는 턱의 모습으로 인해 정교함이 부족하다. 두 손은 가슴까지 들어 전법륜인(轉法輪印)을 취하였다. 다리는 연화대좌 위에 걸쳤는데 한껏 벌리고 않은 모습이 부자연스럽다. 전체적으로 보면 머리로부터 어깨·팔·무릎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평면적이고 거칠게 조각하였다.
이렇듯 현실성이 부족한 조각이지만 얼굴에는 은은한 미소를 머금고 있어 추상적 아름다움을 느끼게도 한다. 마애여래의상 왼쪽 아래에 2개의 또 다른 조각이 있다.
그 하나는 짐을 싣고 있는 말[馬]과 그 말을 끌고 있는 사람이 음각되어 있다. 이는 창건주 의신 조사가 인도에서 경전을 싣고 돌아와 법주사를 창건했다는 설화를 도설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말 앞에 무릎 꿇고 앉은 소[牛]의 모습이다. 절의 중흥조 진표 율사가 금산사에서 나와 법주사로 가는 도중에 한 소가 진표 율사에게 무릎 꿇고 경의를 표했다는 설화를 나타낸 것이다.
마애여래의상을 비롯해서 이 두 가지 설화를 담고 있는 암각화는 예술적으로는 우수하지 못하다. 그러나 절의 구심점인 미륵불과 창건의 설화를 표현하였다는 점에서 그 가치는 높이 평가해야 한다. 마애여래의상 북쪽 벼랑에는 또 다른 마애불이 새겨져 있다. 심하게 마멸되어 정확히 추정하기는 어렵지만 어떤 대좌에 앉아 있는 의상(倚像)의 모습이다.
왼손에는 지장 보살이 지니는 특유의 여의주가 새겨져 있어 지장 보살로 추정한다. 상호의 표현과 옷자락의 모양 등으로 미루어 마애여래의상과 동시대인 고려 초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지장 보살은 지옥세계의 구세주이지만 미륵신앙과의 관계에서 살펴보면 석가불과 미륵불의 중계자이기도 하다.
즉 석가불 입멸 후 미륵불이 출현하기까지의 무불시대(無佛時代)를 주재하면서 미륵불에게 석가불의 법을 전하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관계에서 암각의 지장 보살은 바로 마애미륵불의 출현을 기다리며 수행하는 모습이라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진표 율사의 수행과정에서 보면 이 마애미륵불과 지장 보살과의 관계는 달리 이해할 수도 있다.
즉, 진표 율사는 혹독한 수행을 통해 지장 보살에게서 인가를 받고 법을 전해 받지만, 스님은 궁극의 뜻이 미륵에 있어 그치지 않고 더욱 분발하며 수행하였다고 한다. 진표 율사의 경우 신앙의 중심은 지장이 아니라 미륵에 있었던 것이다. 이런 수행담이 암각화로 표현되면서 미륵불은 정면에 크게 새기고, 지장보살은 구석에 작게 표현했던 것은 아닐까 추정해본다.
법주사 풍경
엄청난 크기의 불상이 보인다.
법주사 석조
법주사 석연지
능인전 앞에 국보 제64호로 지정된 석연지(石蓮池)가 있다. 높이는 200㎝, 전체 둘레는 665㎝에 이르는 이 거대한 조형물이 어떠한 용도로 쓰였는지는 불확실하다. 다만 연꽃 모양으로 조성된 연못이라는 뜻에서 연지라고 부른다.
전체 구조는 네 부분으로 나뉜다. 전체 석조물을 받치고 있는 지대석과 팔각 기단부, 그 위의 구름과 연꽃의 형상이 조각된 원통형의 중대석, 석연지의 몸체, 그리고 상단의 난간이 그것이다. 기단은 외곽에 장방형의 부재로 사각의 테를 두르고 안에 지대석을 두었다. 하대석은 팔각으로 각 면에 안상과 우주를 새겼다.
위에는 3단의 층단으로 체감을 줄여 올라 가다가 복련으로 살짝 덮었다. 중대석은 전체 구조의 기둥 역할을 하는데 둥글게 피어나는 구름문양이 사방을 감쌌다. 위의 거대한 상대석을 받치기 위해 윗면을 아래보다 넓게 하여 안정감 있어 보인다. 상대석인 연지는 반구형(半球形)이다.
밑에서 위로 올라가면서 3단의 커다란 앙련을 새겼고 다시 그 연꽃 속에는 보상화문을 화려하게 나타냈다. 연지의 가장 윗부분은 일종의 난간처럼 보인다. 즉 연지 위에 동자 기둥을 세우고 난간이 올라섰는데, 둥근 원형 면마다 천인상(天人像)을 새겼다.
일부가 파손되기는 했지만 상단에 놓인 이 난간의 형상으로 미루어 혹 향로(香爐)를 조성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추정하기도 한다. 전체적으로 한 송이 연꽃을 염두에 두고 조성했으면서도 섬세하게 조각하여 재질이 화강암이라는 사실을 잊게 만든다.
통일호국 금동미륵대불
팔상전을 배경삼아서
천왕문에는
법주사 사천왕문
금강문을 통해 깨뜨릴 수 없는 불법의 세계를 지나면 천왕문(天王門)을 만난다. 앞면 5칸, 옆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앞면 3칸에는 판문(板門)을 달아 출입하도록 하였고 양쪽의 끝 칸에는 문이 아니라 작은 판창(板窓)을 달았다. 대개 사찰의 금강문은 앞면 3칸 정도의 규모인데, 이처럼 5칸을 마련하고 양옆에 판창을 댄 법주사의 경우는 매우 특이한 경우로, 국내의 천왕문 중 규모가 가장 크다. 현재 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46호로 지정되어 있다. 안에는 사천왕상을 봉안하였는데, 동쪽 세계를 관장하는 지국천왕(持國天王)은 손에 비파를 들고 인간 감정의 기쁨의 세계를 총괄한다. 서쪽 세계를 관장하는 광목천왕(廣目天王)은 용과 여의주를 들고서 노여움의 감정을 주관하고, 남쪽 세계를 관장하는 증장천왕(增長天王)은 칼을 들고 사랑의 감정을 주관하며, 끝으로 북쪽 세계를 다스리는 다문천왕(多聞天王)은 탑 또는 큰 깃대를 들고 즐거움의 감정을 주관한다.이처럼 인간사를 관장하고 있는 사천왕은 착한 일과 악한 일을 적절한 시기에 판단하여 그에 따른 상과 벌을 내린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천왕문에 들어서는 사람들은 두려운 마음으로 최대의 공경을 올리곤 한다.
법주사 팔상전
법주사 팔상전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유일한 5층 목조탑으로 지금의 건물은 임진왜란 이후에 다시 짓고 1968년에 해체․수리한 것이다. 벽면에 부처의 일생을 8장면으로 구분하여 그린 팔상도(八相圖)가 그려져 있어 팔상전이라 이름 붙였다. 팔상도란 1)석가모니가 도솔천에서 내려오는 장면, 2)룸비니 동산에서 마야부인에게 태어나는 장면, 3)궁궐의 네 문밖으로 나가 세상을 관찰하는 장면, 4)성을 넘어 출가하는 장면, 5)설산에서 고행하는 장면, 6)보리수 아래에서 마귀를 항복 시키는 장면, 7)성불 후 녹야원에서 설법하는 장면, 8)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하는 장면 등 석가모니의 일생을 여덟 장면으로 표현한 그림이다.
1층과 2층은 앞․옆면 5칸, 3․4층은 앞․옆면 3칸, 5층은 앞․옆면 2칸씩으로 되어 있고, 4면에는 돌계단이 있는데 낮은 기단 위에 서 있어 크기에 비해 안정감을 준다. 지붕은 꼭대기 꼭지점을 중심으로 4개의 지붕면을 가진 사모지붕으로 만들었으며, 지붕 위쪽으로 탑 형식의 머리장식이 달려 있다.
건물의 양식 구조가 층에 따라 약간 다른데, 1층부터 4층까지는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고, 5층은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공포를 설치한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건물 안쪽은 사리를 모시고 있는 공간과 불상과 팔상도를 모시고 있는 공간, 그리고 예배를 위한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법주사 팔상전은 지금까지 남아 있는 우리 나라의 탑 중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며 하나뿐인 목조탑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미륵대불에서
정말 불상의 크기가 장난이 아니더라는...
범종각은 팔상전의 동쪽 정면에 있는 앞면 3칸, 옆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1976년 종무소를 허물고 그 자리에 새로 지었다. 안에는 범종(梵鍾)·운판(雲板)·법고(法鼓)·목어(木魚) 등이 있다. 이 네 가지의 법구(法具)가 불당 앞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이를 ‘불전사물(佛前四物)’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 네 가지 법구들은 각각의 용도와 의미를 지닌다. 먼저 범종은 지옥에서 한없는 고통을 겪고 있는 중생들을 위해, 운판은 하늘을 나는 날개 달린 짐승들을 위해 모두 이 소리를 들음으로써 영원한 해탈심을 느끼게 한다. 또한 법고는 땅 위에 사는 네 발 달린 짐승들을 위해, 목어는 물 속에 사는 생명들을 위해 울린다.
팔상전과 미륵대불
법주사 쌍사자 석등
대웅보전에서 팔상전에 이르는 앞마당에는 신라시대의 걸작 쌍사자석등(雙獅子石燈)이 있다. 국보 제5호로, 높이 3.3m에 이르는 팔각석등이다. 신라시대의 석등은 대개 하대석과 중대석, 상대석으로 구성되는데 이 중대석을 두 마리의 사자가 앞발을 높이 치켜들어 상대석을 떠받치는 독특한 양식이다.팔각의 지대석은 아래 위에 가는 테를 돌리고 우주를 나타냈다.
윗면에는 역시 팔각의 고임을 나타냈고 다시 그 안에 원형의 고임을 새겼다. 하대석은 한 겹의 커다란 연꽃문양과 그 속에 또 다른 꽃문양을 조각하였다. 위로 올라가면서 점차 좁아져 중대석을 받고 있다. 중대석은 두 마리의 사자가 뒷발로 버티어서고 앞발로 상대석을 받치는 모습으로 새겼다.두 마리의 사자가 가슴을 맞댄 채 머리가 위로 향한 똑같은 모습이다.
사자의 조각은 매우 정교하여 크고 둥그런 눈, 머리의 갈기, 몸체의 근육 등이 마치 살아 있는 느낌이다.사자가 받들고 있는 상대석의 아랫 부분은 두 줄의 가는 받침위에 원형에 가까운 앙련석이다. 다시 그 위의 화사석은 팔각으로 네 면에만 장방형의 화창(火窓)을 냈다. 이곳에 구멍이 여러 개 남아 있다.
옥개석은 위에서 아래로 약간의 경사를 보이고 추녀 끝에서 반전되었다. 옥개석의 위에는 복련과 공모양의 보주로 장식하였다.법주사의 역사에 있어서 영심 대사의 중창 이후 즉 8, 9세기의 사정은 전혀 전하지 않는다. 다만 이처럼 뛰어난 석탑이 있어 8세기 번성하던 절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어 다행이다.
커다란 나무 아래에서 잠시...
법주사 사천왕석등
대웅보전 앞에 높이 3.9m에 이르는 사천왕석등(四天王石燈)이 있다. 보물 제15호로 지정된 이 석탑은 상대석에 사천왕이 새겨져 있어 사천왕 석등이라 부른다. 전체적으로 팔각이 기본 구조를 이룬다.
지대석은 방형으로 네 개의 돌로 구성했다. 그 위의 하대석은 2단인데 하단의 각 면마다 안상을 얕게 부조하였다. 상단은 그릇을 엎어 놓은 형상으로 위로 올라가면서 면을 줄이고 8개의 복련을 나타냈다. 중대석 즉 팔각의 간주석에는 아무런 조각이 없이 늘씬하게 올라갔고 윗부분에만 8개의 앙련을 새겼다.
간주석의 위아래로는 각각 3단, 2단의 옥개받침을 두었다. 화사석 역시 팔각으로서 각 면에는 화창과 사천왕을 번갈아 두었다. 장방형의 화창 주위에는 쌍사자석등과 같이 구멍이 남아 있다. 사천왕의 조각은 매우 역동적이다. 화강암으로 이 정도의 사실적 조각을 이룩했다는 사실이 신라인의 예술성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한다. 옥개석은 경사가 완만하고 끝에서 약한 전각(轉角)을 두었다.
위에는 둥근 보주가 있으나 새로 보수한 것이다. 이 사천왕 석등에서 우리는 신라 석등의 전형적 모습을 발견할 수 있으며, 그 장식성이나 조각 기법으로 보면 쌍사자 석등과 같은 8세기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법주사 대웅보전
대웅보전(大雄寶殿)은 앞면 7칸, 옆면 4칸의 2층 팔작지붕 건물이다. 옛 기록과 기단석(基壇石의) 양식으로 보아 지금의 건물은 고려 중기에 처음 세운 것으로 보인다.
신라 때 창건했을 무렵에는 대웅보전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에는 미륵장륙상을 모신 용화보전이 있어 미륵신앙 도량인 법주사의 중심 역할을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기록에 의하면, 1624년(인조 2)에 중건하였고 이후 잦은 중수를 거듭하였지만, 조선 중기의 양식을 잘 갖추고 있어 보물 제915호로 지정되었다.
2층 건물의 구조를 위해 안에는 두 줄의 기둥을 세우고, 그 앞뒤로 바깥 기둥을 세워 서로 연결하였다. 2층에 비해 1층이 높은 편이지만 좌우로 7칸에 달하는 큰 규모를 감안하면 아주 적절한 비율이라고 할 수 있다. 충청남도 마곡사(麻谷寺)의 대웅전과 무량사(無量寺)의 극락전, 전라남도 화엄사(華嚴寺)의 각황전 등과 함께 2층 전각으로서 매우 귀중한 건물이다.
안에는 닫집 없이 후불탱의 위를 막아 천룡이 불상과 불화를 호위하도록 했다. 170평에 달하는 건물의 내부에는 비로자나불(毘盧舍那佛)을 주존으로 석가여래(釋迦如來)와 노사나불(盧舍那佛)이 협시한 삼신불(三身佛)을 봉안하였다.
연화대좌 위에 좌정한 삼신불은 흙으로 빚었다고 믿기 어려울 만큼 거대한 규모로서, 1624년 대웅보전을 중창하면서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크기는 전체 높이 550㎝이고 허리 둘레 390㎝로서 우리 나라의 소조불상 중에서 가장 크다. 삼신불의 모습은 대체로 서로 일치하고 수인만 다르다.
즉 비로자나불은 오른손으로 왼손을 감싸고 있는 지권인(智拳印)이고, 오른쪽의 노사나불은 한 손은 하늘을 향하고 한 손은 밖을 향하는 설법인(說法印), 왼쪽의 석가불은 한 손은 위를 향해 펼치고 한 손은 바닥을 향해 있어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키고 있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취하였다.
전체적으로 경직된 상호에 눈과 코, 입의 선이 작고, 목은 웅크린 듯 짧게 표현하였다. 삼신불 뒤로 삼신불후불탱을 봉안하였다. 불상과 마찬가지로 각각 독립된 후불탱으로서 1925년 보응(普應)·문성(文性) 스님 등이 그렸다. 비로자나후불탱은 세로 616㎝, 가로 348㎝의 커다란 종이에 족자로 이루어졌다.
중앙에 비로자나불이 크게 자리 잡고 상단에는 문수·보현보살과 성문중(聲重衆), 하단에는 성중과 동자상을 표현하였다. 좌우의 노사나후불탱과 석가여래후불탱은 규모만 조금 작을 뿐 비로자나후불탱과 흡사하다. 대웅전 오른쪽 벽에는 1897년에 조성한 신중탱이 있고, 왼쪽 벽에는 1928년에 조성한 삼장(三藏)탱이 있다.
지금의 건물은 2005년 10월 4년간의 공사끝에 벽암대사가 중창한 이후 400년만에 옛모습 그대로 원형 복원한 것이다.
명부전과 삼성각
명부전 명부전(冥府殿)은 앞면과 옆면 각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진영각과 삼성각 사이에 있다.
명부전에는 명부세계를 주재하는 지장보살을 주존으로 모신다.
지장보살은 석가여래 입멸 후 미륵불이 출현할 때까지 무불(無佛) 세계의 중생들을 구제하겠다는 원을 세운 분이다. 도리천(쩸利天)에서 머물면서 미혹에 빠져 있는 중생들을 깨달음의 세계로 인도한다. 지옥에 단 한 명의 중생이라도 남아 있다면 성불하지 않겠다고 하여 스스로의 성불마저도 미뤄 둔 대자비의 보살이다.
일찍부터 법주사는 지장 보살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절의 중흥조 진표 율사는 몸을 돌보지 않는 치열한 수행을 통해 지장보살에게서 정계(淨戒)를 받았다. 삼국유사에는 ‘지장보살이 석장을 흔들며 와서 가호하니 손과 팔이 전과 같이 되었다. 보살이 스님에게 가사와 발우, 그리고 계본(戒本) 등을 주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스님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더욱 분발하여 마침내 미륵의 수기(授記)를 받았다고 한다.
이후 스님은 금산사에 이르러 지장신앙에 입각한 점찰법회를 거행하였다. 이러한 법주사 지장신앙의 전통은 다시 제자 영심에게 이어져 나갔던 것이다.
지금의 명부전은 최근에 조성한 것이다.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절에는 지장전이라 하여 지장보살을 봉안한 전각이 있었으나, 이후 18세기와 20세기 초의 가람에는 지장전이 사라졌다. 안에는 오른손에 석장을 잡고 왼손에 여의주를 든 지장보살과 그 협시로 도명존자·무독귀왕을 봉안하였다.
다시 그 좌우로는 각각 5구씩의 시왕상이 있는데 시왕상마다 모두 동자상을 대동하였다. 또한 각 2구씩의 판관·녹사·인왕상도 배치되었다.
지장보살상 뒤에는 1996년에 조성한 지장보살도가 있고, 1992년에 주조한 동종도 있다. 명부전 외벽에는 삼면에 걸쳐 지옥세계의 무서운 장면이 벽화로 그려졌는데, 이를 통해 중생들로 하여금 경계심을 일으켜 생전에 선업을 닦도록 가르침을 준다.
삼성각(三聖閣)은 대웅보전 왼쪽에 위치하는 앞면 3칸, 옆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안에는 칠성(七星)·독성(獨聖)·산신(山神)을 탱화로 봉안하였다. 칠성은 북두칠성을 말하고, 산신은 우리 나라 고유의 재래신앙이 불교에 스며든 것이다. 그리고 독성은 부처님의 16제자 중의 하나였던 나반존자를 가리킨다. 삼성각은 이처럼 불교와 외래신앙이 습합된 결과로서 특히 산신의 역할이 강조되면서 대개 가람의 외곽에 들어 서 있다.
그러나 법주사의 가람 구조상 산 쪽으로 진출하기 어려웠던 듯 대웅보전의 오른쪽에 자리 잡았다. 안에 봉안된 탱화들은 1991년에 조성한 것이다. 중앙의 칠성탱은 상단부에 북두칠성을 상징한 칠성여래가 있고, 중단부에는 북극성에 해당하는 치성광여래(熾星光如來)를 중심으로 좌우에 일광·월광보살이 협시하였다. 그리고 하단부에는 수많은 별들의 무리를 나타낸 28수(二十八宿)의 무리가 보살상처럼 표현되었다.
왼쪽의 독성탱은 천태산(天台山)에 머물며 홀로 수행하는 독성을 중심으로 2명의 시자가 시봉하고 있다. 산신탱은 호랑이를 타고 앉은 산신 할아버지와 시자의 모습이다. 삼성각 외벽에는 호랑이와 숲 속에서 수행하는 독성의 모습을 벽화로 나타냈다.
넓기는 하던데 여기저기 공사 중... 그리고 관광객 출입금지가 많았다.
당간지주.
금강문을 들어서면 바로 좌우에 당간지주(幢竿支柱)와 철확(鐵)이 마주 보고 서 있다. 당간지주는 당간과 지주가 합쳐진 말이다. 당간은 절의 행사나 법회 등을 알리는 안내문을 높게 세운 깃대로서 찰(刹) 또는 찰주(刹柱)라고도 부른다.지주는 이 당간을 세울 수 있도록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버팀돌이다. 일반적으로 당간은 목재로 만들기 때문에 남겨진 예가 거의 없고 지주만 남아 흔히 당간지주라고 부른다.법주사의 당간지주는 고려 초인 1006년(목종 7)에 조성된 것으로서, 조성 당시의 높이가 16m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 뒤 조선 후기인 1866년(고종 3) 대원군의 명령으로 국가에서 당백전(當百錢)을 주조하기 위해 사찰의 많은 금속물들이 징발 당했다.이런 과정에서 당시 용화전의 미륵장륙상과 이 철당간이 사라졌던 것이다. 1910년 무렵 22m 높이의 철당간을 확대, 복원하였고 1972년에 보수하여 지금에 이른다.
여기는 수정암이라고 하던데
커다란 바위를 지나야 한다.
사리를 모신 곳인지....
커다란 나무를 베어낸 밑둥에서 싹이 나오고 있다.
숲 속 산책로
다람쥐가 나무에 매달려 있다.
토피어리로 만든 다람쥐
다람쥐와 함께
오늘은 시원한 생맥주에 후라이드치킨이 먹고 싶어서 부근에 있는 식당을 여기저기 찾아서 돌아다녔는데
아무래도 없을 것 같던 생맥주와 후라이드치킨을 파는 곳을 찾았다.
모퉁이를 돌아서니 멀리 퓨전포장마차가 보이고
퓨전포장마차에서 목우촌치킨을 파는 또래오래
두드리면 열릴 것이라더니 ....^^*
먼저 숙소에 들어가서 삼년산성과 법주사를 구경하느라 흘렸던 땀을 깨끗이 씻고
퓨전포장마차로 향했다.
먼저 후라이드 순살치킨으로 한 마리를 주문하고
잠시 후, 생맥주가 나왔다.
고창에서부터 먹고 싶었던 시원한 생맥주와 후라이드치킨이 있으니 세상에서 부러울 게 아무 것도 없다.
순살치킨이라서 먹기도 편하고...^^*
골뱅이무침도 하나 시켰는데 맛은 그냥 그랬다.
옆지기는 소면을 삶아달라고 할까? 하는데 소면을 삶아서 비벼먹어도 새콤하고 달달한 맛이 날 것 같지 않은 양념이라서 그냥 포기했다.
둘이서 생맥주는 2,500cc를 마시고
안주로 먹었던 순살치킨은 모두 거덜나고 골뱅이무침은 남았다.
이제 휴가 둘째 날이 가고 있다. 많이 걷고 많이 보느라 힘이 들었지만 즐겁고 재미있었던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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