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일 아침이 밝았다.
평소와는 다르게 느긋하게 맞이한 아침.
옆지기는 어제 저녁에 먹었던 닭백숙에 불린 찹쌀을 넣어서 닭죽을 만드느라 분주하게 움직인다.
아침을 닭죽으로 배불리 먹고
ㅋㅋ... 제리는 졸려서 눈이 가물거리고 몸은 뒤로 넘어가는 중.
그래도 휴가라고 왔으니 주변을 다니기로 하고 집을 나섰다.
두산약수터 옆에 잠시 차를 세우고 물구경을 했다.
물이 별로 없던 두산교 부근에는 장맛비 덕분에 물이 많이 흐르고 있다.
물이 흐르니 보기 좋더라는
요선정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요선정으로 가는 길에 만난 사자상.
사자상을 본 제리가 악을 쓰면서 짖는다.
ㅋㅋ... 웃겨서.
요선정으로 올라가는 오솔길
요선정이 보이기 시작했다.
요선정으로 오르는 옆지기와 제리
요선정과 요선암 사이를 지나는 옆지기
요선정
* 단종을 복위한 숙종과 요선정 *
영월 땅에 세분 군왕의 어제어필시문(御製御筆詩文)이 내려진 것은 숙종 말년인 172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숙종대왕께서는 1446년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에 유배된 후 사약을 받고 승하하신 선대왕을 단종으로 복위하고 종묘에 모시는 한편 노산묘를 장능으로 추봉하는 등 조선 초기의 왕조애사를 바로 잡기위해 힘쓰신 분으로, 영월 유배길의 소상한 일들을 물어 살피시다가 1698년(숙종24) 정월에 憑虛, 晴虛兩樓詩(빙허, 청허양루시)한수를 써서 당시 강원감사 심정보에게 내리니 어제어필 시문이 주천현루인 청허루에 간직되었다. 그러나 청허루에 화재가있어 어제시는 누대와 함께 소실되고 말았다. 그 후 청허루를 중건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영조대왕께서는 선왕의 시문을 먼저와 같이 그 자리에 보존하기 위해 숙종대왕의 어제시를 손수 쓰고, 그 뒤에 다시 시 한편을 더 보태어 당시의 강원감사인 임집(林鏶)에게 내리니 새로 중건된 청허루에는 두 임금의 어제시를 봉안하게 되었고, 그후 다시 정조대왕께서는 청허루에 봉안된 두 분 선왕의 어제시를 소중히 간직할 수 있도록 "敬吹酒泉縣樓所奉 序"(경취주천현루소봉 서)를 지어 두분 선왕의 어제시옆에 걸게 하니 그 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있다. 주천은 옛 고을로서 지금은 원주에 속해 있으며 청허와 빙허의 두 누각이 있는 경치좋은 곳으로 옛날 심정보목사가 있던 고을이다.
숙종대왕께서 지으신 시의 현판은 그간 화재를 입었는데 무인년 고을을 지키던 신하가 중건하였음을 영조대왕께서 들으시고 原篇(원편)을 찾아 손수 쓰시고 서문을 지으시여 근신에게 명하여 달게하니 한 누각이 이루어지고 훼손되는데 따라 무겁고 가벼움이 있는게 아니라. 좋은 글과 글씨가 황홀하기만 하니 이 누는 이것으로 빛나고 그 고을의 산천 또한 이 누로 인해 빛나니 이누각이 이 고을의 자랑이 아니겠는가. 기와를 잇고 수리하는 일은 가히 힘쓸줄 믿으니 공경해서 시를 짓고 대략을 적어 그 곁에 달게 하노라> 하는 내용의 서문과 함께 정조대왕은 어제시 한편을 내려주셨다. 그러나 이 자랑스러운 두 누각은 오랜 세월 속에 퇴락하여 마침내 무너졌고, 세 임금의 보묵(寶墨)은 민가에서 보존되니 이를 봉안하고자 무룽리에 요선정을 짓고 어제어필시문을 봉안하게 되었다. 요선정에 봉안되어 있는 어제시는 두 틀 板額(판액)에 보존되어 있으며,그 중 하나에는<숙종대왕어제시> 와 <영조대왕어제어필시>를 담았고, 다른 한쪽에는 정조대왕의 친필서 문과 어제시를 담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요선정·요선암 (대한민국 구석구석, 한국관광공사)
* 바위에 음각된 불상, 무릉리 마애불좌상 *
요선정 옆 바위 한 면에 음각으로 새겨 놓은 마애불좌상은 1982년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74호로 지정되었다. 강원도 내 마애불상은 많지 않다. 철원군 동송면에 있는 마애석불과 함께 문화재로 지정된 예는 2구에 불과하다. 이 곳에 있는 마애불은 그 중의 하나로 얼굴은 양각으로 되어 있으나 그 밖의 부분은 선각으로 음각한 좌상이다. 얼굴은 타원형으로 양감이 풍부하며 머리는 소발로 육계가 있다. 상체는 길고 원만하지만 결가부좌를 하고 있는 하체는 상체에 비해 크게 조각이 되어 조금은 균형을 잃고 있다. 두 손은 가슴에 표현하였는데 오른손은 자연스럽게 펴서 손등을 보이고 있고, 왼손은 오른손에 평행이 되게 들고 있다. 광배는 두신광을 표현하였으며, 그 중 두광은 연꽃무늬를 돋을 새김하였고, 신광은 두줄로 선각해 놓았다. 밑으로 연꽃 문양의 대좌가 있어 그 위에 부처가 앉아 있는 모습으로 높이는 3.5m이다. 전체적으로 상하의 균형을 잃고 있으나 힘찬 기상이 잘 표현되어 있는 마애불상으로 옆에 있는 청석탑과 함께 고려 시대에 제작된 불상으로 추정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요선정·요선암 (대한민국 구석구석, 한국관광공사)
요선암
강원도 영월군 수주면 무릉리, 백덕산(白德山, 1,350m)과 태기산(泰岐山, 1,261m)에서 흘러내린 물이 합쳐져 주천강 상류를 이루는 지점의 강 속에 있는 커다란 반석으로 요선암(邀仙岩)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조선 전기의 문장가이자 서예가인 봉래 양사언(楊士彦1517~1584)이 평창군수를 지낼 때 이곳의 경관을 즐기다 새긴 글씨라 전해지고 있다.
‘요선(邀仙)’이란 ‘신선을 맞이한다’는 뜻이다. 바위뿐 아니라 바위 주변을 통틀어 요선암이라고 부르는데 맑은 강 속에 커다란 바위들이 넓게 깔려 있어 경치가 아주 뛰어나다. 요선암 뒤쪽으로는 1915년 건립한 정자인 요선정(邀僊亭, 강원도문화재자료 제41호)이 자리 잡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영월 요선암 [寧越邀仙岩] (두산백과)
요선정 뒤로 흘러가는 주천강을 배경으로 ...
제리와 같이..
뒤로 보이는 풍경이 정말 멋있다.
바위에서 자라는 소나무
아래는 급경사의 절벽이라서....-.-:;
운학리에 다닌지가 오래되었지만 가까이에 있는 요선정에는 처음 방문했다.
조용하고 아름다운 풍경이 있는 요선정
느긋하게 즐길 수 있어서 좋았다는...^^*
바위에서 소나무가 자라고 있으니
제리는 옆지기 등 뒤로 돌아다니다가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다.
잠시 앉아서 흘러가는 주천강을 바라보며....
다음 장소로 이동..
요선암 돌개구멍으로 걸었다.
좁은 관람로를 따라서 걸으면
요선암 돌개구멍으로 가는 이정표가 보인다.
요선암 돌개구멍
주천강 하상(河床) 약 200m 구간에 걸처 화강암반 위에 폭넓게 발달해 있으며, 구멍은 지름이 수십 센티미터에서 1m, 깊이는 수십 센티미터에서 2m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와 규모를 갖고 있다. 이러한 돌개구멍은 하천의 윤회와 유수에 의한 침식과정과 이에 의한 지형의 형성을 밝힐 수 있는 자료로서 학술 가치가 크며, 바위를 곡선으로 조각해 놓은 듯한 여러 개의 돌개구멍이 복합적으로 발달한 지형 자체가 가지는 경관 가치도 우수하여 천연기념물로 보존하게 되었다.
돌개구멍(Pot Hole)은 ‘속이 깊고 둥근 항아리 구멍’이란 의미로 하천에 의해 운반되던 자갈 등이 오목한 하상의 기반암에 들어가 유수의 소용돌이와 함께 회전하면서 커다란 항아리 모양으로 기반암을 마모시켜 발달한 지형이다. 주로 사암이나 화강암과 같은 단단한 암석에서 잘 발달하며 형태로는 원형이나 타원형이 많다.
[네이버 지식백과] 영월 무릉리 요선암 돌개구멍 [寧越武陵里邀仙岩ㅡ] (두산백과)
제리와 주천강으로 향하는 옆지기
들어가보라고 목줄을 당기는 옆지기....
안 들어간다고 버티던 제리...^^*
그래도 아쉬웠던지 흘러가는 주천강을 바라보고 있다.
뭔가 주천강을 헤엄치면서 거슬러서 올라오고 있기에 내려가서 강가로 나갔더니
독사 한 마리가 헤엄치고 있었다.
잡아서 죽이려다가 옆지기가 그냥 두라기에 헤엄치는 모습만 찍었다.
물살이 강해서 자꾸 아래로 밀려간다.
모르고 헤엄을 치다가는 독사에게 물리기 쉽겠더라는...
독사를 보면 항상 잡아서 죽였었는데 오늘은 그냥 참는다.
간신히 바위틈으로 들어서기는 했는데 물살에 밀려서 위로 올라오지는 못했다.
옥수수를 사서 집으로 돌아갈 예정이다.
요선암 돌개구멍을 구경하고 주차장으로 가는 길.
옥수수가 있으려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