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살이

에펠탑과 루부르박물관(2011.12.23)

또랑. 2012. 1. 27. 22:39

에펠탑과 루브르박물관.

 

여행 이틀째에는 어디를 다녀왔는지 출~발

 

 

어서 옵셔... 개선문.

 

 

나폴레옹 1세가 군대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하여 1806년에 세운 파리의 에투알 개선문.

 

1806년

나폴레옹 1세

가 휘하 군대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하여 계획하였다. 설계는 주로 J.F.

샬그랭

이 맡았으나 그는 얼마 안 가서 죽고

나폴레옹

자신도 실각하였기 때문에 공사는 중단되었다가 1836년에 이르러서야 겨우 완성되었다. 높이 49 m, 너비 45 m로 대체로 고대

로마

개선문

의 양식을 따랐으나

프랑스

근세

고전주의

의 걸작으로 꼽힌다. 각부()를 장식한 조각 가운데 F.뤼드의 《라 마르세예즈()》(1833~1836)은 특히 유명하다. 아치의 중앙 밑에는

제1차 세계대전

의 무명용사 묘비가 세워져 있다.

 

 

우리 딸래미가 이럴 일이 없는데 분명히 제원이나 예신냥이 시켜서 하는 포즈

 

 

맥도널드에 들러서 잠시 휴식

 

 

샹젤리제거리에 있는 쇼핑센터를 걷고 있다.

 

 

분명히 누군가가 팔을 들라고 했을듯...ㅋㅋ

 

 

쉐포라매장 앞에서 백곰과 선물놀이를 하고 있다.

 

 

샹젤리제거리쪽 크리스마스 마켓

 

 

프랑스 대통령의 공식 관저인 엘리제궁

 

 

마카롱으로 유명한 라듀레

 

 

콩코드광장

 

 

뒤로 파리의 명물인 에펠탑이 보인다.

 

 

점심 먹으러 들른 식당

 

 

바게트빵이 나오고

 

 

맛있어 보이는 게살요리인데 허브처럼 보이는 채소.

 

 

굴과 연어가 올라간 요리

 

 

새우튀김

 

 

커다란 닭다리와 감자가 보이는데 무슨 요리인지...

 

 

오리와 감자

 

 

양고기스튜까지 ...

 

넷이서 점심을 너무 거하게 먹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에펠탑 아래에서

 

 

올려다보기가 부담스러울 정도로 참....높다.

 

 

에펠탑

 

1889년 3월 31일 준공되었고, 1889년 5월 6일 개관하였다. 이것을 세운

프랑스

의 교량기술자 A.G.에펠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높이는 1063피트(약 324m)로 그 이전에 건설된 어떤 건물에 비해서도 약 2배에 이르는 높이였다. 완공 당시

모파상

과 같은 예술가와 지식인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재료로는 프랑스에서 제조된 7,300t의 시멘즈 마르탕

평로강

이 사용되었다. 탑에는 3개소에 각각 전망

테라스

가 있다. 파리의 경치를 해치는 것이라고 해서 심한 반대가 있었으나 그대로 남아 무전탑()으로서 이용되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55피트의 텔레비전 안테나가 덧붙여져서 텔레비전의 송신탑으로 사용되고 있다. 탑의 높이는 건설 후 약 40년간 인공

건조물

로서는 세계 최고였다

 

 

아이들 셋이서...

 

 

벼룩시장같은 분위기

 

 

퐁네프의 다리

 

프랑스

파리 센 강(

Seine

river)을 가로지르는 유명한 다리이다. 시테 섬(Île de la Cité)의 서쪽 끝과 센 강의 오른쪽 강둑 지역을 연결하고 있다.

파리에서

가장 긴 역사를 가지고 있는 다리이다. 하지만 다리의 이름 퐁네프(Pont Neuf)는

프랑스어

로 ‘새로운 다리’라는 뜻이다. 1570년 말

앙리 3세

(King

Henry

III, 1551~1589)에 의해 공사가 시작되었으나 완공된 것은 1607년

앙리 4세

(King Henry IV, 1553~ 1610) 통치 시기였다. 퐁네프의 개장식이 있을 때 앙리 4세는 흰색 말을 타고 다리를 가로질렀다고 한다. 다리의

중앙 지점

에는 말을 탄 앙리 4세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흰색 돌이 주요 자재로 사용되었으며 아치형태의 기둥이 바치고 있는 구조로 지어졌다. 이후 수십 차례 대대적인 개조와 보수 작업이 진행되었으나 현재에도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

퐁네프의 연인들

(Les Amants du Pont-Neuf),1991>이라는 영화의 성공으로 세계적으로 큰 명성을 얻었을 얻었다. 하지만 퐁네프는 실제 영화 촬용지로 사용되지 않았다.

 

 

세느강을 다니는 유람선

 

 

루브르 박물관/ 카루젤개선문

 

1871년

파리코뮌

시가전

() 때 불타 없어진

튈르리궁전

이 있었던 곳이다. 지금의

튈르리정원

동쪽 끝에 있으며, 서쪽으로는

파리에서

가장 큰 광장인

콩코르드 광장

과 이어진다. 그러나 카루젤 광장보다는 이 광장 가운데 있는

개선문

이 더 유명해 흔히

카루젤개선문

으로 통한다.

카루젤 개선문은

에투알 개선문

과 함께 파리에 있는 2개의 개선문 가운데 하나이다.

나폴레옹 1세

가 1805년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해 1808년에 세웠는데, 1806년의 승전을 기념해 세운 에투알 개선문(1836년 완공)에 비해 규모는 훨씬 작다.

개선문의 높이는 14.6m, 너비는 19.5m이다. 문 위에는 네 마리의 청동 마상()이 있고, 이 네 마리 말의 양쪽에서 전차를 몰고 있는 병사와 승리의 여신이 말을 잡고 있다. 말 고삐와 병사·여신은 금빛이고, 문 정면 윗부분에는 네 명의

인물상

이 일정한 간격으로 서서 앞을 바라보고 있다. 문은 중앙의 정문을 중심으로 좌우에 작은 두 개의 문이 있는데, 전체적으로 정교하면서도 안정된 느낌을 준다.

콩코르드 광장의

오벨리스크

드골

광장(

에투알

광장)의 에투알 개선문을 일직선으로 연결하는 중심에 있다.

 

 

 

루브르박물관 투명 피라미드

 

루브루박물관

 

프랑스

파리의

루브르궁전

을 미술관 건물로 사용하고 있으며, 소장된 미술품의 규모는 세계 최대이다. 원래

루브르궁

에는 역대 프랑스 국왕들, 특히

프랑수아 1세

,

루이 13세

,

루이 14세

등이 수집해 놓은 방대한 양의 미술품이 소장되어 있었는데

프랑스 혁명

후인 1793년

국민의회

가 그것을 공개하기로 결정함으로써 미술관으로 정식 발족하고 그 뒤로도 꾸준히 미술품 수집이 계속되어 오늘날의 대미술관이 이루어졌다.개관 이래

프랑스 미술

의 중심적 구실을 하면서 전세계의 미술가나 미술 연구가 및 애호가들이 수없이 찾아들어 파리의 빼놓을 수 없는 명소가 되어 있다. 특히 젊은

화가나

조각가에게 거장()들의 작품을 직접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미술 발전에 기여하는 의의는 매우 크다. 또한

루브르미술관

의 관장()이 전국의 공 ·사립 미술관 운영을 총괄하도록 되어 있어, 프랑스 미술관 행정의 총본산이기도 하다.수집된 미술품은 고대에서 19세기까지의

오리엔트

및 유럽 미술의 모든 분야를 망라하고 있으며, 등록이 완료된 것만 해도 총 20만 점을 넘는다. 작품은 각 부분마다 연대 ·지역별로 분류되어 광대한 루브르궁전의 북동()을 제외한 거의 모든 건물의 각 층에 배치되어 있다. 회화 ·공예 부문은 2 ·3층에, 조각 부문은 1 ·2층에 진열하고 있다. 또한 19세기

인상파

이후의 회화 부문 역시 루브르미술관 소관인데 그 작품들은 '

인상파미술관

'에 전시하다가, 1986년에 완공된

오르세미술관

으로 옮겨 전시 중이며,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

》을 비롯하여 모네 ·드가 ·

피사로

·르누아르 ·세잔 ·

고흐

근대 회화

에서 선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화가들의 우수작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밀로의 비너스상

 

높이 204cm.

프랑스

루브르미술관

소장.

멜로스의 아프로디테

(Aphrodite of Melos)라고도 한다. 1820년 4월 8일

에게해

에 산재하는

키클라데스제도

의 하나인

밀로스섬

(밀로섬 또는 멜로스섬이라고도 한다)에 있는

아프로디테

신전 근방에서 밭을 갈던 한 농부에 의해 발견되어 마침 이 섬에 정박 중이던 프랑스 해군이 이것을 입수하여 다음해 리비에르 후작의 손을 거쳐

루이 18세

에게 헌납되어 왕명으로 루브르미술관에 소장되었다.발견 당시 이 여신상은

고전기

()의 거장 브락시테레스의 원작이라고 떠들썩하였으나, 그 후 연구 결과 현재는 BC 2세기에서 BC 1세기 초에 제작되었으리라는 설이 유력하다. 품위 있는 머리부분이라든지 가슴에서 허리에 걸친 우아한 몸매의 표현에는 BC 4세기적인 조화를 보이기도 하지만, 두발()의 조각과 하반신을 덮는 옷의 표현은 분명히

헬레니즘

의 특색을 나타내고, 그 고전적인 자태는 헬레니즘의 극단적인

사실주의

에 대한 반동으로, 고전 양식의 부활이라는 당시의 풍조에서 태어난 걸작이다.허리부분을 단면으로 하여 상하() 두 개의 대리석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양팔이 없다. 그 없는 부분의 복원()에 대해서는 그 제작연대와 마찬가지로 고고학자나

미술사

가 사이에서 계속 많은 고찰이 있었다. 결국 오른손은 왼쪽 다리께로 내려지고 왼손은 팔을

앞으로

내밀어 제쳐진 손바닥에 사과를 들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821년 루브르미술관에 소장된 후

두문불출

의 명작으로도 유명했으며, 1964년 처음으로 세계나들이를 한 바 있다. 

 

 

밀로의 비너스상 앞에서

 

 

사모트라케의 니케

 

파리

루브르미술관

소장. BC 190년경에 제작된 작품으로 하늘에서 뱃머리에 내려와 서 있는 날개가 달린 니케(승리의 여신)를 표현하고 있다. 머리부분과 양 팔뚝은 없어졌다. 1863년

사모트라키섬

에서 발견,

로도스섬

사람들이 시리아의

안티오코스 3세

에 대한 전승을 감사하여 사모트라키섬 카베이로 신역() 가까이에 세운 상()으로 추정된다. 

 

 

사람들이 많이 몰려있는 곳

 

 

그곳에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가 전시되어 있다.

 

유채() 패널화로 크기는 세로 77㎝, 가로 53㎝이다. 프랑스 루브르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라 조콘다(La Gioconda)라고도 한다. 모나리자의 모나는 이탈리아어유부녀에 대한 경칭, 리자는 피렌체부유한 상인 조콘다의 부인 이름이다. 조 콘다부인은 G.포지의 조사를 통하여 피렌체의 안토니오 마리아 디 놀드 게라르디니의 딸임이 판명되었다. 따라서 본명은 리사 게라르디니(Lisa Gherardini)이다.

이 작품은 부인의 나이 24~27세 때의 초상이며, 레오나르도가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의 초청을 받았을 때 이 미완성의 초상화를 가지고 갔었는데, 왕에게 4,000에큐에 팔려 퐁텐블로성()에 수장되었다. 때때로 세정()도 하고, 광택용 니스를 바르기도 한 관계로 전체에 균열이 생겨 제작 당시의 시원스럽고 여유 있는 필치는 볼 수 없다.

이 초상은 눈썹이 없는 것으로 유명한데, 이에 대해서는 당시 넓은 이마가 미인의 전형()으로 여겨져, 여성들 사이에 눈썹을 뽑아버리는 일이 유행하였기 때문이라는 설, 미완성작이라는 설, 원래 눈썹이 그려졌으나 복원 과정에서 지워졌다는 설 등이 있다. 또 2009년에는 프랑스의 미술전문가가 240메가픽셀의 특수카메라를 사용하여 분석한 결과, 다 빈치는 이 그림을
3차원으로 표현하기 위하여 유약으로 여러 겹을 특수처리하였고, 가장 바깥에 그려졌던 눈썹이 수백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화학반응을 일으켜 사라지거나 떨어져나간 것이라는 주장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다 빈치는 이 작품을
그리기 위하여 악사와 광대를 불러 부인의 심기()를 항상 즐겁고 싱그럽게 함으로써 정숙한 미소를 머금은 표정, 편안한 손 등 신기()를 표현할 수 있었다고 한다. 전기()작가 바사리에 따르면, 이 그림은 4년이 걸리고도 미완성인 채로 끝났다고 하는데,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원숙기인 제2피렌체시대에 해당하는 1503∼1506년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모나리자의 미소’는 보는 사람에게 신비성을 느끼게 하여 많은 풍설()과 함께 ‘모나리자의 수수께끼’로서 오늘날도 적지 않은 문학적 관심거리이다. 요컨대 이 그림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인간에 대한 오묘한 감정과 관능의 표현인 것이다. 이 그림의
역사적 경로에는 불분명한 점이 많아 모나리자에 대한 신비성의 깊이를 더하고 있다. 일찍이 《모나리자》가 대낮에 루브르미술관에서 도난당하여 세상을 놀라게 한 사건도 있었다. 그로부터 2년 후, 범인이 피렌체의 미술상 A.골리에게 팔러 나갔을 때, 골리의 기지로 다시 햇빛을 보게 되었다. 이 그림만큼 친근감을 주면서 많은 문제를 제시하는 작품도 드물다.

 

 

자크 루이 다비드의 나폴레옹 대관식

 

고전주의미술

의 창시자인

다비드

의 1807년 작품으로,

루브르미술관

에 소장되어 있다. 다비드는

프랑스혁명

이 일어나자 미술관계의 제도개혁에 관여하며 황제의 제1화가가 되었다.

나폴레옹

을 만난 다비드는 열렬한 나폴레옹 추종자가 되었고 《

알프스

를 넘는 나폴레옹》 등 황제를 찬미하는 대작을 여러 점 남겼다. 이 작품도 그 중 하나로 사람들의

심리적

반응을 강조하여 나타냄으로써 역사의 극적인 순간을 재현시켰다.

역사적

소재를 다루는 다비드의 회화관을 엿볼 수 있다.

대관식

은 1804년 12월 2일에 있었는데 다비드는 그 해 작품의 제작을 의뢰받아 다음해 12월이 되어서야

그리기

시작했다. 그림은 나폴레옹이 스스로 대관한 후에 황후가 될

조제핀

에게 관을 씌워 주는 광경으로 교황

피우스 7세

가 대관을 축복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러한 화면 구성은 나폴레옹의 권력이 스스로의 힘에 의한 것이지 타인으로부터 수여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암시한다.

나폴레옹과 관계된 모든 인물이 등장하며

제각기

개성적인 모습을 하고 있는데, 역사적 사실을 충실하게 재현하면서도 그 내용을 독자적으로 강조하고 각 인물의 성격과 심리적 반응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1810년에 전시되었으며 다비드는 이 작품으로 나폴레옹의 10년상을 받기도 했다.

 

 

 

어디를 올려다보는지

 

 

루브르 박물관 역피라미드

 

 

손가락으로 꾸욱...